[화정실록] 기-승-전-소현세자, 그는 정명이 꿈꾸던 왕재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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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창사 54주년 특별기획드라마 <화정>과 함께 하는 조선시대 역사 읽기. 마지막으로 소현세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혼돈의 조선시대, 정치판의 여러 군상들이 권력과 욕망에 맞서 투쟁하는 이야기를 다룬 <화정>이 어느덧 단 2회만을 남겨두고 있다. 강렬하게 퇴장한 선조부터 시작해서 최근 즉위한 효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왕과 신하의 관계를 보여주었던 <화정> 속에서 정명공주가 그리던 세상에 가장 근접했으나 결국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며 비극으로 남은 인물이 있었다. 바로 소현세자다.


부정도 불의도 침탈도 없는 세상.
오직 만 백성이 근심없이 살 수 있는 세상.
스승님, 그런 세상이 이 나라 조선에도 오겠습니까.
그 일을 제가 해낼 수 있겠습니까.


소현세자는 1625년 14세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었다. 당시 자식 교육에 큰 관심을 두고 있었던 인조는 이름 높은 학자들을 시강원(侍講院, 조선시대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한 관청)의 관원으로 삼아 소현세자를 가르쳤다.

두 차례의 호란을 겪으며 인조를 곁에서 보필했던 소현세자는 결국 1637년 청에 볼모로 잡혀가게 될 때에도 인조의 극진한 배웅을 받았다. 당시 인조는 아들들이 온돌 방에서 잘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하며 건강을 염려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힘쓰도록 하라. 지나치게 화를 내지도 말고 가볍게 보이지도 말라." 이는 인조가 마지막으로 세자에게 당부한 인사였다.


저와 봉림은 반드시 다시 돌아와
저들에게 모든 죄를 묻고 이 땅을 바꿀 것입니다.


8년 간의 볼모 생활은 역시나 험난했다. 청에서는 소현세자를 조선과의 교섭 창구로 활용하고자 했고, 세자의 직권으로 조선에 지시를 내리기를 요구했던 반면, 조선에서는 소현세자가 조선의 입장을 전달하고 문제를 중재하기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조선과 청 사이에 끼어 있는 그의 현실은 정신적, 육체적 괴로움을 동반했고 잦은 병치레로 이어졌다.

하지만 소현세자는 청의 고관대작들과 친분을 쌓으며 점차 그들의 신뢰를 얻었고, 왕실의 사냥이나 연회 등에도 초대 받았다. 당시 청에서 조선을 담당하고 있던 용골대와는 특별히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심양장계 ©민족문화대백과사전
병자호란에 패한 뒤 소현세자 등이 청나라에 볼모로 가 있는 동안 그곳에서 신하들이 본국에 올린 장계를 모아 놓은 책.


뿐만 아니라 소현세자가 생활했던 심양관소는 일종의 대사관과 같은 역할을 하며 하나의 기관으로 구색을 갖추게 되었다. 이때 소현세자는 청과의 외교적 문제를 절충하고 청의 유력자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비용들을 자체적으로 마련하고자 여러 시도를 병행했다. 예를 들면 조선의 포로를 사들여 땅을 경작하도록 하여 식량 마련을 하는 동시에 포로 구출의 목적을 달성했으며, 교역을 통해 직접 돈을 벌어들이기도 했다. 그 결과 소현세자가 청에서 돌아왔을 때 심양에 남겨 놓은 곡물이 4,700여 석, 농사 짓는 일꾼이 16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렇듯 소현세자가 조선과 청 사이에서 정치적으로 부각되면서 일종의 재량권을 행사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다. 청과 가까운 지역의 지방관들이 청과 관련한 사안에서 소현세자의 지시를 따르는 경우가 그것인데, 이러한 소현세자의 세력 확대는 조선을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음에도 점점 아버지 인조의 경계를 사게 된다.


소자가 오랜 청국생활에서 깨달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 나라 조선이 너무도 작고 뒤쳐져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소자는 우리가 병란을 겪은 것이 우리의 모자람과 부족함 때문이란 걸 깨달았고
그렇기에 이제 그것이 누구든 앞선 자를 배워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그렇게 먼저 진실로
자신의 잘못을 깨우쳐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또한 소현세자는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접하면서 조선의 현실을 직시하고 실질적인 학문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북경에 머물고 있던 예수회 신부 아담 샬과 친교를 맺어 약 두 어 달간 많은 대화를 나누며 서신을 교환하기도 했고, 이를 통해 얻은 서양의 천문, 수학, 천주교 서적 등을 조선에 가지고 오는 등 서양 과학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소현세자에게 냉정해진 인조의 마음은 돌아서지 않았고, 실록 곳곳에는 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1644년, 세자빈의 아버지인 강석기가 사망하여 소현세자 부부가 귀국했을 때, 인조는 강빈이 곡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 몰인정한 처사를 자행했다.


영의정 심열, 좌의정 김자점, 우의정 이경여가 아뢰기를,
"세상에 어찌 8년 동안 서로 막혀 있다가 천리 거리에서 귀국하여 지척에 계신 어버이를 만나보지 않고 그냥 되돌아가는 이치가 있겠습니까. (중략) 세자께서 당초에 빈궁과 함께 돌아가겠다고 청할 때 부친은 죽고 모친은 병중에 있다는 것을 아울러 거론하여 그 이유로 내걸었는데, 이제 찾아가 곡하고 모친을 살펴보는 절차가 없으면 저쪽 나라가 그 말을 들을 때 또한 반드시 의아해 할 것입니다. 신들이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때 아무래도 미안한 바가 있으므로 감히 소견을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과인이 지금 재변이 참혹하고 민심이 안정되지 않은 것을 걱정하느라 법 밖의 예나 외람한 행동에는 생각이 미칠 틈이 없다." 하였다.

-『인조실록』 1644년(인조 22) 2월 9일




이러한 인조의 태도는 세자의 귀국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신하들이 세자가 돌아온 것은 나라의 경사이기 때문에 모든 신하가 하례를 올리는 것이 온당하다고 하였으나 인조는 그조차도 막았다.


헌부가 아뢰기를,
"세자가 영원히 돌아온 것은 실로 전에 없던 온 나라의 경사이니, 신민들의 손뼉치며 기뻐하는 마음이 의당 어떠하겠습니까. 한번쯤 하례를 올리고 옥안을 우러러 보는 것은 인정이나 예의상 그만두지 못할 일인 듯한데, 갑자기 권정하라는 명이 있으므로 조정의 모든 관원들이 모두 실망합니다. 사세가 매우 바빠서 미처 진달하지 못하였으나 하루쯤 물려서 거행하더라도 늦지 않습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다시 의논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날짜를 물려서 거행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하였다.

-『인조실록』 1645년(인조 23) 2월 20일




결국 소현세자는 귀국 후 단 두 달 만에, 향년 34세의 나이로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다. 게다가 세자의 죽음에는 여러 석연치 않은 점들이 남아 있어 독살 의혹마저 제기되고 있다. 죽음 후에도 인조는 당시 소현세자의 치료를 맡았던 의관 이형익의 처벌을 거부했고, 세자의 장례를 지나칠 만큼 소박하게 치렀으며, 법도대로라면 소현세자의 아들이 이었을 세자 자리를 봉림대군에게 넘겨주는 등 독살설에 힘을 더하는 행적을 남겼다.


상의 행희(幸姬) 조 소용(趙昭容)은 전일부터 세자 및 세자빈과 본디 서로 좋지 않았던 터라, 밤낮으로 상의 앞에서 참소하여 세자 내외에게 죄악을 얽어 만들어서, 저주를 했다느니 대역부도의 행위를 했다느니 하는 말로 빈궁을 무함하였다. 세자는 본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병을 얻었고 병이 난 지 수일 만에 죽었는데, 온 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鮮血)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幎目)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 빛을 분변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 그런데 이 사실을 외인(外人)들은 아는 자가 없었고, 상도 알지 못하였다.

-『인조실록』 1645년 (인조 23) 6월 27일-


소경원 ©문화재청
소현세자의 묘지


소현세자와 함께 청에서 생활했지만 그 경험을 토대로 '북벌'이라는 또 다른 목표를 그리게 된 효종의 실험이 결과적으로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며 먼저 운명을 달리한 소현세자에 대한 후대인들의 안타까움은 더욱 극대화되었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만약 소현세자가 인조의 뒤를 이어 왕좌에 올랐다면 우리는 달라진 조선을 기억하게 됐을까? 그렇다면, <화정>은 소현세자가 아닌 효종을 통해 어떤 희망을 제시하며 종영을 맞이하게 될까?

이 기사는 한국콘텐츠진흥원, 국사편찬위원회, 한국학중앙연구원, 문화재청 등에서 개방한 공공저작물을 참고하여 작성되었습니다.



iMBC연예 김은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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