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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정실록] 이 시각 광해군은? 18년 유배생활의 외로움에 사무치다

기사입력2015-09-01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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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창사 54주년 특별기획드라마 <화정>과 함께 하는 조선시대 역사 읽기. 열다섯 번째로 유배 후 광해군의 삶에 대해 다룹니다.



꿈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 땅에 남은 사람들이 있는 한,
그들이 희망을 놓지 않는 한.

그러니 부디 이 아름다운 조선이 지켜지기를,
나의 백성과 이 산천이 안돈하기를...

비록 때론 혹독한 시련 가운데 무너질 지라도
이 땅이 다시 일어설 수 있기를...




병자호란이 발발하며 <화정>이 긴장감을 더해가고 있는 이 때, 드라마 상에서 퇴장한 광해군은 사실 유배지에서 이 전란의 시기를 함께 겪고 있었다. 인조반정 이후 대다수 광해군의 측근들은 죽음을 면하지 못하였지만, 정작 광해군 자신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기 때문. 그러나 광해군의 말년은 죽는 것 이상의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상이 의병을 일으켜 왕대비를 받들어 복위시킨 다음 대비의 명으로 경운궁에서 즉위하였다. 광해군을 폐위시켜 강화로 내쫓고 이이첨 등을 처형한 다음 전국에 대사령을 내렸다.

-『인조실록』 1623년(인조 1) 3월 13일


1623년, 조선왕조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반정이 일어났다. 명분은 폐모살제(廢母殺弟)의 죄였다. 김자점, 김류, 최명길, 이괄 등의 서인들은 반정을 도모하였고, 능양군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이것이 바로 인조반정이다.

광해가 폐위된 뒤에도 쫓겨나지 않고 대궐 안에 있자 대비는 수차례 교지를 내려 속히 외지에 안치하라고 하였다. 내용이 간절하여 심지어 두 번 절하고 청한다는 말까지 하였다. 이리하여 폐위된 광해군은 폐비 유씨, 폐세자 이지, 폐빈 박씨과 함께 강화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 중죄를 저지른 이가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로 울타리를 만들고 가두는 형벌)되었다.




폐세자 이지가 위리 안치된 상황에서 땅굴을 70여 척이나 파 울타리 밖으로 통로를 낸 뒤 밤중에 빠져 나가다가 나졸에게 붙잡힌 사실을 강화 부사 이중로가 치계하여 보고하였다. (중략) 폐세자 지가 체포된 지 3일째에 폐빈이 스스로 유배지에서 목을 매어 목숨을 끊었는데, 호조로 하여금 옷과 이불을 보내게 하여 염습하고 여가에 옮겨 빈소를 차리게 하였다.


-『인조실록』 1623년(인조 1) 5월 22일


그러나 그해 5월, 폐세자가 담 안으로부터 흙을 파고 구멍을 뚫어 도망쳐 나가는 것을 잡았다는 강화부윤 이중로의 장계가 올라왔다. 당시 세자는 손에 은덩이와 쌀밥을 쥐고 있었다고 한다. 세자가 체포된 3일 후 폐빈 박씨는 목을 매어 자살하였고 체포된 폐세자 이지 또한 6월 어명에 따라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폐위된 후 장성한 아들과 며느리를 한꺼번에 잃은 1623년, 광해군은 부인 유씨와도 사별하게 된다. 당시 유씨는 반정으로 친정 오빠들인 유희분과 유희발이 참형을 당하고, 아들과 며느리가 목을 매어 자살하는 참사가 연이어 발생하자 깊은 마음의 병을 얻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 이후에도 광해군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인조 2년(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는 광해군을 견제해 그를 강화에서 태안으로 이배하였다가 다시 강화도로 데려왔다. 이어 '전왕 광해군을 위한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으로 정묘호란(1627년)이 발발하자 다시 "강화는 중요한 곳이고 서울과 가까우므로 광해군을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게 됐고, 결국 광해군은 강화도 옆의 교동도에 다시 위리안치된다. 얄궂게도 그는 자신이 임해군, 영창대군, 능창군 등을 유배보냈던 강화도와 교동도에 결국 스스로 갇히게 된 셈이다.


風吹飛雨過城頭(풍취비우과성두)
瘴氣薰陰百尺樓(장기훈음백척루)
滄海怒濤來薄幕(창해노도래박막)
碧山愁色帶淸秋(벽산수색대청추)
歸心厭見王孫草(귀심염견왕손초)
客夢頻驚帝子洲(객몽빈경제자주)
故國存亡消息斷(고국존망소식단)
烟波江上臥孤舟(연파강상와고주)

바람 불어 날리는 비는 성벽 위를 지나가고
습하고 더운 독기 백척 누각 덮었구나
창해의 파도 속에 날은 이미 어둑하고
푸른 산의 슬픈 빛은 싸늘한 가을 기운 띠었구나
돌아오는 마음으로 실컷 왕손초 보려하는데
나그네 꿈 속의 제주는 번번이 잠을 깨우네
고국의 존망은 소식조차 끊어진 지 오래 되니
안개 자욱한 강 위에 외딴 배만 누워 있네

-광해군이 교동에서 제주도로 유배지를 옮길 때 지은 시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고 치욕스러운 항복을 하고 난 인조와 조정 대신들은 결국 1637년 광해군을 제주도로 보내고 만다. 인조는 "국가가 10년 사이에 세 차례의 변란을 겪었으니, 광해 자신을 위해서도 제주로 옮기는 것이 편안할 것 같다."고 밝혔지만, 실제로는 후금과의 관계를 비교적 잘 유지하려 했던 광해군이 한양과 가까운 강화나 교동에 있는 것이 부담스러웠을 것이라 짐작된다.

남양주 광해군묘(사적 제 363호) ©문화재청


이처럼 그를 노리는 정적들로 인해 광해군은 수차례 죽음의 위기를 겪었으나 비교적 의연하게 대처하려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배지에 데리고 가는 관리가 광해군을 아랫방에 거처하도록 모욕을 주어도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썼고, 심부름하는 나인이 영감이라고 부르며 멸시하는 굴욕도 참고 지냈던 것.

그러나 이런 그도 외로움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유배 초에 가족을 모두 잃은 후 광해군은 "옛 궁인 중 한 명이라도 생전에 만나보는 것이 소원이다."라고 말할 만큼 극도의 외로움을 호소하며 고통스러워했던 것. 그 때문에 끼니도 물에 말은 밥 한두 숟갈로 연명한 채 옷도 갈아입지 않았고, 때로는 벽을 치며 통곡을 하는데 기력이 쇠하여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결국 1641년, 광해군은 18년 간의 유배 생활을 끝으로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으며 어머니 공빈 김씨의 묘 근처에 묻어달라 요청하여 남양주에 안치되었다.


나의 가장 큰 잘못은 바로 너같이 무도한 자에게 어좌를 내 준 것이로구나.
너는 결코 같은 일을 겪는 군주가 되지 말거라.
오늘의 나를 기억하고, 장차 네가 누구의 앞에도 무릎을 꿇지 않도록,
이 나라 백성 모두가 그리 될 수 있도록,
깨어 있거라, 능양.


긴 유배생활로 인해 인조 시기의 험난한 풍파를 함께 했던 광해군. 과연 반정으로 임금의 자리에서 내려온 광해군이 전란을 겪으며 갖은 모욕을 당하는 인조를 바라보는 마음은 어떠했을까. 또한 광해군의 죄목을 지적하며 왕좌에 올랐으나 외세로부터 치욕적인 패배를 맞보아야 했던 인조가 광해군을 생각하는 마음은 어떠했을까. 같은 시대 두 왕의 미묘한 동거가 새삼 흥미롭다.

이 기사는 공공누리, 한국콘텐츠진흥원, 국립중앙도서관, 국사편찬위원회, 문화재청 등에서 개방한 공공저작물을 참고하여 작성되었습니다.



iMBC연예 김은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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