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런데 상의 행희(幸姬) 조 소용(趙昭容)은 전일부터 세자 및 세자빈과 본디 서로 좋지 않았던 터라, 밤낮으로 상의 앞에서 참소하여 세자 내외에게 죄악을 얽어 만들어서, 저주를 했다느니 대역무도의 행위를 했다느니 하는 말로 빈궁을 모함하였다. 세자는 본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병을 얻었고 병이 난 지 수일 만에 죽었는데, 온 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鮮血)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幎目)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 빛을 분변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藥物)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 그런데 이 사실을 외인(外人)들은 아는 자가 없었고, 상도 알지 못하였다. -『인조실록』 1645년(인조 23) 6월 27일 |

숙원(淑媛) 조씨(趙氏)를 소의(昭儀)로 삼았다. 세자 책봉 후에 으레 있는 은전이다. 이때 중전 및 장 숙의(張淑儀)가 모두 사랑을 받지 못하고 소의만이 더더욱 총애를 받았으며, 또 성품이 엉큼하고 교사스러워서 뜻에 거슬리는 자를 모함하기가 일쑤이므로, 궁중에서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 중에서도 소현 세자빈 강씨(姜氏)가 가장 미움을 받아 참소와 이간질이 날이 갈수록 더 심하였는데, 강문성(姜文星)이 귀양가게 되자 사람들이 모두 강씨에게 화가 미칠 날이 멀지 않았음을 알았다. -『인조실록』 1645년(인조 23) 10월 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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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주오룡리귀부(公州五龍里龜趺) ©문화재청 귀부는 비받침부분을 일컫는 말로, 대개 거북 모양을 띠고 있다. 이 귀부는 조선 제 16대 임금인 인조의 아들 숭선군의 신도비(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무덤 가까이에 세우는 비)를 세우기 위해 만든 것이나 비를 세우지 못하고 중단되어 귀부만 남은 것이다. 숭선군은 이름은 징(徵)이고, 인조의 다섯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귀인 조씨(趙氏)이다. 효종 2년(1651) 누이인 효명옹주의 시할아버지 김자점의 역모에 관계되었다 하여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효종 7년(1656)에 석방되어 벼슬과 지위를 되돌려 받았다. |
1649년 소의 조씨는 마침내 종1품 귀인(貴人)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그 해 인조가 죽고 효종이 즉위하자 김자점과 함께 주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결국 1651년(효종 2) 귀인 조씨가 장렬왕후와 효종을 저주했다는 죄목이 드러나며 자결하라는 명을 받고 사사되었다. 당시의 자백들에는 귀인 조씨가 옛 무덤에서 썩은 관 조각을 구하고 불상을 주조했으며, 부정한 내용으로 기도를 일삼고 사람의 뼛가루를 비롯한 더럽고 흉한 물건들을 궁궐 주변의 땅에 묻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저주를 행했음이 드러나 있다.
"우리들이 옛 무덤에서 썩은 관의 조각을 구하여 조 귀인에게 바쳤습니다. 그리고 불상(佛像)을 주조하고 부도(不道)한 내용으로 기도한 등의 일에 대해서도 모두 참여하여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귀인이 작은 궤짝에다 사람의 뼈가루를 담아서 우리를 시켜 옹주에게 전해주게 하여 저주하는 데 쓰게 하였습니다." -『효종실록』1651년(효종 2) 11월 23일 "역적 조씨가 저주한 변고는 극히 흉악하고도 참혹하다. 그 딸과 함께 역모를 꾸며 흉측한 뜻을 부렸다. 이에 안으로는 궁액의 은밀한 곳과 밖으로는 대군(大君)과 부마(駙馬)의 집에 아침 저녁으로 출입하면서, 세수하고 머리 빗을 때 쓰는 도구라고 칭하고서 몰래 흉하고 더러운 물건을 감추었으며, 옷소매 속에 넣어 스스로 가지고 다니기도 하였다. 심지어는 흰 이가 있는 두골(頭骨)과 누린내나는 뼛가루를 밀봉하여 몰래 가지고 가서는, 자전과 대전에 흩뿌리게도 하고 파묻게도 하였다는 설이 요사스런 무당인 앵무(鸚鵡)의 공초에서 나왔다. (중략) 이는 임금을 무시하고 나라를 무시한 계책으로, 끝내는 반드시 왕가(王家)의 지친을 모두 해친 다음에야 그만두었을 것이다." -『효종실록』1651년(효종 2) 12월 14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