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창사 54주년 특별기획드라마 <화정>과 함께 하는 조선시대 역사 읽기. 열세 번째로 이이첨의 일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결국 전부를 잃는 것인가.
이렇게... 이렇게 허망하게...
<화정> 속 강렬한 존재감을 발휘했던 이이첨이 결국 비극적 최후를 맞이했다. 남다른 촉으로 빠르게 살아남는 길을 찾고, 그 안에서 자신이 권력을 누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을 실행에 옮기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였다. 그저 그런 관리 중 한 명이었다가 "온나라 사람들은 이첨이 있는 것만 알고 임금이 있음을 알지 못하였다."고 실록에 기록될 만큼 요즘으로 따지면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가 결국 죽임을 당했던 이이첨의 파란만장한 일생에 대해 알아보자.

진짜 마지막까지, 끝까지 가는 놈이 누군지 보자.
이이첨은 1582년(선조 15) 사마시에 합격하고 1593년(선조 27) 광릉참봉(光陵參奉)을 지냈다. '참봉'이란 문관 종구품(從九品) 중 최말단 관직이다. 1594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고 1599년 이조정랑(정오품 관직)이 되었으며 1608년 문과중시에 장원급제하였다. 1598년(선조 31)에는 황해도와 평안도 일대에서 암행어사로 활동하며 관리들의 횡포를 고발하기도 했다.
임진왜란 시기에 광릉에 있는 세조 능의 위패를 지켜 선조의 총애를 받기도 하였던 이이첨은 후사문제에서 본격적으로 광해군의 편에 서게 된다. 영창대군의 옹립을 주장하는 소북이 선조의 뜻을 받을었던 것과 달리 광해군의 옹립을 주장하는 대북의 일원이었던 것. 이로 인해 이이첨은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유배당했으나 선조가 갑작스럽게 승하하면서 운명이 뒤바뀌게 된다.
근래의 관원들은 이이첨의 복심이 아닌 자가 없습니다. 간혹 그들의 무리가 아니면서 한두 사람 그 사이에 섞여 있는 자들은, 반드시 그 사람됨이 무르고 행실이 줏대가 없으며 시세를 살펴 아첨이나 하며 세상 되는 대로 따라 사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무릇 대각의 계사에 대해서 전하께서는 반드시 대각에서 나온 것이라고 여기시지만 사실은 이이첨에게서 나온 것이며, 옥당의 차자를 전하께서는 반드시 옥당에서 나온 것이라고 여기시지만 사실은 이이첨에게서 나온 것이며, 전조의 주의를 전하께서는 반드시 전조에서 나온 것이라고 여기시지만 사실은 이이첨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풍지를 받들어 그렇게 하기도 하고 그의 지휘를 받아서 그렇게 하기도 합니다. 비록 옳은 일이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그에게 물어본 뒤에 시행합니다. -『광해군일기』 8년 12월 21일 |
광해군의 즉위와 함께 이이첨은 예조판서(정이품 관직)의 자리에 오른 것은 물론 자신의 외손녀를 세자빈으로 만드는 데에 성공하며 광창부원군(廣昌府院君)에 봉해졌다. 이어 그는 권세를 장악하고 대북의 세력을 강화하는 한편 임해군, 영창대군, 김제남 그리고 유영경을 비롯한 소북파 등 피의 숙청에 앞장 섰다. 그 과정에서 무고한 사람들에게 죄를 덮어씌우기도 해 악명이 드높았다. 뿐만 아니라 인목대비 폐모론에도 강하게 목소리를 보탰는데 이는 훗날 인조반정의 빌미가 되기도 했다. 결국 이이첨의 수많은 궤적들이 광해군의 왕권 강화를 돕고 자신의 배를 불리는 데에 일조했지만, 또 그만큼 그들의 몰락을 앞당기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할 수 있다.

전부를 얻거나 모두를 잃거나.
모르고 시작하셨습니까.
그것이 권력입니다.

그래 알지. 그것이 권력이지.
그래서 난 전부를 얻을걸세.
빠르게 성공가도를 달렸던 만큼 이이첨의 최후 역시 인조반정과 함께 순식간에 비극적 결말로 치달았다. 1623년 반정이 일어나자 가족을 이끌고 영남지방으로 도망가던 중 관군에게 붙잡혀 그의 세 아들과 함께 참형에 처해진 것. 참형 당시 도성 사람들이 모여 구경하면서 서로 축하의 인사를 전했고, 그의 시체를 난도질하여 온전한 데가 없을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이이첨에 대한 당대의 기록도 사뭇 냉정하다. 그가 득세했던 광해군 시기에도 그를 규탄하는 상소가 줄을 이었다.
신이 보기에 이첨은 서궁이라는 고깃덩어리 하나를 가지고 임금을 팔아 자기를 이롭게 하려는 기회로 삼고 있는 데 불과합니다. 그리하여 전에는 앞장서서 주동하면서 여론에 핑계를 대다가 뒤에 와서는 몸을 빼면서 뭇 영예를 도적질하려고 한 것인데, 그럼으로써 화를 여러 사람이 받도록 전가하고 엄청난 이름을 군부에게 돌리려 하면서 자신은 슬며시 자취를 숨기는 등 거리낌 없이 제멋대로 행동한 것입니다. -『광해군일기』 1618년(광해10년) 4월 6일- |
이처럼 죽음은 비참했고, 그를 향한 기록과 평가들은 냉혹하지만 이이첨은 60세가 넘는 나이까지 장수하며 권세를 누렸다. 비록 권력을 잃은 뒤 주변의 태도가 180도 바뀌었고 역사에서 간사하고 악독한 인물로 평가받게 되었지만, 그는 한 개인이 추구할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하고도 강렬한 삶을 살다 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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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BC연예 김은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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