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창사 54주년 특별기획드라마 <화정>과 함께 하는 조선시대 역사 읽기. 열두 번째로 인조반정에 대해 다룹니다.
<화정>의 큰 전환점이 될 '인조반정'이 시작됐다. 드라마 속 능양군은 적극적으로 세력을 규합하며 이제는 왕좌를 넘보게 되었고, 광해군은 자신의 사람을 지키기 위해 그 자리를 기꺼이 포기하는 것으로 그려지며 긴장감을 고조되고 있는 상황. 과연 실제 인조반정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이제 내가 불의한 폐주 광해를 몰아내고 새로운 나라를 세울 것이니!
잊지 말거라. 바로 이곳에 나의 사람들은 남을 것이니!
바로 그들이 너와 그 모든 불의한 자들에 맞서 끝내는 이길 것이니!광해군 시기 영창대군, 임해군이 죽음을 당하였고 인목대비는 대비의 존호를 빼앗긴 채 서궁에 갇힌다. 광해군의 '폐모살제(廢母殺弟)', 즉 어머니를 유폐하고 아우를 죽인 행위는 대북파에게 눌려 지내던 서인 세력을 결집시키는 계기인 동시에 반정의 명분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평소 광해군이 역모 사건에 민감하게 반응했다는 것을 그의 존호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역모를 진압할 때마다 받은 존호가 무려 48자로 조선의 역대 왕들 중 가장 길다.
또한 ‘친금배명(親金排明)’으로 해석될 소지가 있는 명과 후금 사이 광해군의 중립 외교 정책은 명에 대한 의리를 앞세우는 명분론자들이 반(反)광해군 세력의 기치 아래 결집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여기에 무리한 궁궐 공사가 백성들의 공분을 사며 민심까지 기울자 본격적인 반정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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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별서유기비 ©문화재청 이 석비는 조선왕조 제16대 임금 인조(1623~1649)가 반정으로 왕위에 오르기 전에 머물렀던 별서를 기념하고자 숙종 21년(1695)에 세운 것으로 인조반정에 관련된 중요한 역사적 사실과 그 현장을 증명해 주는 사료로써 가치가 있다. |
능양군 역시 광해군에게 깊은 원한을 품고 있었다. 광해군의 박해로 동생을 잃고 이로 인한 충격에 아버지까지 사망하는 일을 겪었던 것. 측근에서부터 세력을 규합하며 방법을 모색하던 능양군은 무신 이서와 인조의 외가인 신경진·구굉 등과 함께 정변 계획을 수립했다. 1620년 신경진은 무신 출신만으로는 정변을 성사시키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무관직 경력이 풍부한 문신을 포섭하기 시작하였고, 김류와 이귀, 최명길·최래길 형제와 김자점·김련 부자 등의 문신들을 대거 합류시켰다.
상이 의병을 일으켜 왕대비(王大妃)를 받들어 복위시킨 다음 대비의 명으로 경운궁에서 즉위하였다. 광해군을 폐위시켜 강화(江華)로 내쫓고 이이첨 등을 처형한 다음 전국에 대사령을 내렸다. -『인조실록』1년 3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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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변 당시, 친병(親兵)을 거느린 능양군과 함께 이서의 군사 7백여 명, 김류·이귀·심기원·최명길·김자점·송영망·신경유 등의 군사 6~7백여 명이 집결했다. 이들은 늦은 밤 창의문을 통과해 곧바로 창덕궁에 이르렀다. 이흥립은 궁문 입구에서 군사를 단속하여 정변군에 대항하지 못하게 했다. 정변군이 바로 궁 안으로 들어가자 호위군은 모두 흩어지고 광해군은 후원문(後苑門)을 통하여 달아났다. 군사들이 앞을 다투어 침전으로 들어가 횃불을 들고 수색하다가 그 횃불이 발(簾)에 옮겨 붙어 여러 궁전이 불에 타기도 했다.
처음엔 인목대비조차도 반정을 믿지 않았다. 도망간 광해군이 잡히자 능양군은 가마에 오를 것도 거부한 채 직접 광해군을 데리고 인목대비에게 갔다. 이를 본 백성들 중에는 "다시 어진 임금이 다스리는 세상을 볼 줄 생각하지 못하였다."며 눈물을 흘린 이도 있었다고 한다. 결국 광해군은 인목대비 앞에 무릎 꿇었고, 인목대비는 광해군의 죄목 36가지를 직접 밝힌 뒤 옥새를 능양군에게 넘겼다. 이로써 능양군은 조선의 16대 왕 인조로 공식적인 인정을 받으며 반정의 정당성을 확보했다.
風吹飛雨過城頭(풍취비우과성두) 瘴氣薰陰百尺樓(장기훈음백척루) 滄海怒濤來薄幕(창해노도래박막) 碧山愁色帶淸秋(벽산수색대청추) 歸心厭見王孫草(귀심염견왕손초) 客夢頻驚帝子洲(객몽빈경제자주) 故國存亡消息斷(고국존망소식단) 烟波江上臥孤舟(연파강상와고주)
바람 불어 날리는 비는 성벽 위를 지나가고 습하고 더운 독기 백척 누각 덮었구나 창해의 파도 속에 날은 이미 어둑하고 푸른 산의 슬픈 빛은 싸늘한 가을 기운 띠었구나 돌아오는 마음으로 실컷 왕손초 보려하는데 나그네 꿈 속의 제주는 번번이 잠을 깨우네 고국의 존망은 소식조차 끊어진 지 오래 되니 안개 자욱한 강 위에 외딴 배만 누워 있네
-광해군이 교동에서 제주도로 유배지를 옮길 때 지은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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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정이 일어나기 몇 달 전부터 역모를 고변하는 투서가 잇따랐음에도 광해군은 어떠한 대응도 하지 않았으며 반정 당일에도 연회 중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를 두고 정치적으로 고립된 광해군이 반정 모의를 알지 못했다거나, 별 일 아니라는 김개시의 말에 속았다는 등 다양한 가설이 존재하긴 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은 미스테리로 남아있다.
이후 광해군은 19년 간 유배생활을 하며 '늙은 영감'이라 불리는 등 갖은 모욕을 겪다 유배지인 제주도에서 생을 마감했으며, 끝내 역사에 왕이란 이름으로조차 남지 못했다. 또한 대북파 신하들을 비롯 수십 여명이 참형에 처해지거나 귀양을 갔으며, 상궁 김개시도 반정 다음 날 살해당했다.
이 기사는 공공누리, 국립중앙도서관, 국립중앙박물관, 문화재청에서 개방한 공공저작물을 참고하여 작성되었습니다.
iMBC연예 김은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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