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정실록] 조선 2대 암군(暗君) 선조VS인조, 누가 더 막장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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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창사 54주년 특별기획드라마 <화정>과 함께 하는 조선시대 역사 읽기. 열한 번째로 선조와 인조의 악행을 비교해봅니다.


연산군과 함께 '조선 3대 암군(暗君)'으로 불리곤 하는 선조와 인조. <화정>은 이들이 불러오는 혼란 속에서 그 시작과 끝을 함께 하고 있다. 왜 선조와 인조는 후대의 사람들에게 이렇게 가혹한 평가를 받게 된 것일까. 그 답을 역사적 사실 속에서 찾아보자.



左 인조 역 김재원 ㅣ 선조 역 박영규 右



1. 뜻밖의 왕위 계승


선조는 조선왕조 사상 최초의 방계 출신 왕이다. 중종의 서자였던 덕흥군의 셋째 아들로 왕위와는 거리가 멀던 인물. 그러나 명종이 34세라는 젊은 나이로 후사 없이 사망하게 되면서 왕위에 오를 후계자로 지목되었다. 인조 역시 영창대군과 같은 적통도 아니었고, 광해군에 밀려 순리대로라면 왕위에 오를 일이 없었던 인물이었으나 직접 정변을 모의하여 운명을 바꾼 경우다.

그러나 결국 명분이 중요했던 조선 시대에 선조는 출신의 한계에서 오는 열등감을 여러 측면에서 분출했고, 인조는 광해군을 끌어내린 '부도덕성'과 '실정'이라는 잣대로부터 자신도 자유롭지 못하게 되며 재위 기간 내내 위태로운 모습을 이어갔다.



2. 내란으로 인한 사회의 혼돈


선조가 사림 세력을 대거 등용하면서 많은 인재들이 정계에 진출했지만 이조전랑 직을 둘러싼 갈등으로 동인과 서인이 갈라지며 본격 붕당 정치 시대의 서막이 오른다. 서인 세력과 대립각을 세우던 정여립은 결국 관직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내려갔으나 이후 역모죄로 몰려 아들과 함께 도망가다 자살한다. 그가 실제로 반역을 꿈꿨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사건은 정철 등의 서인 세력의 주도 하에 처리되었고 이발, 이호, 백유양 등 동인 세력이 정여립과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처형되었다. 정여립 모반 사건에서 출발해 동인 유력 인사들의 대규모 처단으로 이어진 이 사건을 '기축옥사(己丑獄死)'라 하며 당시 연루된 사람만 해도 약 1천 명에 육박했다.


인조 대에는 이괄이 크게 난을 일으켰다. "이 때문에 이괄 등이 크게 두려워하여 반역할 모의가 더욱 굳어졌다."는 기록처럼 독특하게도 반란의 계획이 없었던 이괄을 인조가 벼랑 끝으로 내모는 악수를 두었다고 평가되는 사건이다. 결국 이괄이 이끄는 군대는 평안도를 출발하여 한양에 입성했는데 조선에서 반란군이 한양을 점령한 것은 이성계 이후로 처음이었다. 인조는 기자헌, 유몽인 등 옥에 갇힌 북인계 인사 50여 명을 아무런 증거도 없이 처형하며 기강을 잡고자 하였으나 결국 공주로 피난을 떠났고, 반란군에 패하는 관군과 비상시에 궁을 떠나는 왕의 모습은 백성들의 신뢰를 잃기에 충분했다.

이처럼 선조와 인조는 당파에 따른 대규모의 숙청을 자행했다. 그러나 그 결과 상당수의 관료층이 죽임을 당하여 조정에 공백을 가져왔고, 대내외적인 위협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채 각각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3. 막지 못한 전쟁과 전후 대비책의 부재


전쟁은 선조와 인조의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커다란 전환점이었다.

당파 싸움으로 혼란스럽고 병력도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와중에 명나라로 가는 길을 내어달라는 구실로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는 도망을 선택한다. 조선시대 왕의 상징성을 고려할 때 선조가 도망을 간 것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볼 수도 있으나 이를 둘러싼 많은 기록들이 그를 옹호하기 어렵게 한다.

당시 신하들은 한사코 왕이 궁을 떠나는 것을 만류하였는데, 신잡은 "전하께서 만일 신의 말을 따르지 않으시고 끝내 파천하신다면 신의 집엔 80세의 노모가 계시니 신은 종묘의 대문 밖에서 스스로 자결할지언정 감히 전하의 뒤를 따르지 못하겠습니다."라며 단호히 아뢰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선조는 황급히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한 채 도성을 떠났고, 백성들은 궁에 불을 지르는 등 격분했다. 심지어는 파천 이후에도 더 안전한 곳을 찾아 명나라에 망명할 계획까지 세웠으나 시행되지는 못하였다.

선조국문교서 ©문화재청
선조 26년(1593) 임진왜란으로 임금이 피난하여 의주에 있을 적에 백성들에게 내린 한글로 쓴 교서이다. 임진왜란 때 조선의 백성들은 포로가 되어 왜적에 협조하는 자가 많았다. 그 때문에 선조는 대중이 쉽게 알 수 있는 한글로 쓴 교서를 내려 포로가 된 백성을 회유하여 돌아오게 하였다. 어쩔 수 없이 왜인에게 붙들려 간 백성은 죄를 묻지 않는다는 것과 왜군을 잡아오거나 왜군의 정보를 알아오는 사람, 또는 포로로 잡힌 우리 백성들을 많이 데리고 나오는 사람에게는 천민, 양민을 가리지 않고 벼슬을 내릴 것을 약속한 내용들이 실려 있다.


전쟁을 대하는 무책임한 태도 외에도 선조는 임진왜란의 수훈갑이라고 할 수 있는 이순신을 홀대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순신의 파직과 재임명을 반복하며 전선에 혼란을 초래했음은 물론, "이순신은 처음에는 힘껏 싸웠으나 그 뒤에는 성실하지 않았다", "힘껏 싸운 장사(將士)들에 대해서는 그 공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겠으나 우리 나라 장졸에 있어서는 실제로 적을 물리친 공로가 없다." 등과 같은 안일한 현실 인식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를 두고는 전후 혼란한 와중에 유능한 장군들에게 쏠리는 민심을 돌리고자 일부러 외면했다는 해석도 있다. 전자라면 무능하고, 후자라면 교활한 것이니 어느 쪽도 긍정적으로 해석하긴 어렵다.


평화로운 200년의 역사를 이어 받은 선조에 비해 명청 교체라는 큰 국제 정세 변화에 직면한 인조가 그 배경에 있어서는 조금 더 불리하게 출발했다. 또한 인조가 대외적으로 '배금'을 기조로 하긴 했지만 광해군 대의 외교정책을 완전히 뒤바꾼 것은 아니기에 호란(胡亂)의 책임을 전적으로 지는 것이 부당할 수도 있다. 후금이 형제의 관계를 요구해오며 정묘호란을 일으킨 후에는 오히려 화친에 가까운 행보를 보이기도 한다.

백마산성을 지킨 임경업 ©국립중앙박물관
1616년 만주에서 건국한 후금은 '전왕 광해군을 위하여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을 걸고 진군하여 안주, 평산, 평양을 점령하고 황주를 장악하였다. 조선에서는 장만을 도원수로 삼아 싸웠으나 평산에서부터 후퇴를 거듭, 그 본진이 개성으로 후퇴하였고 인조 이하 조신들은 강화도로 피하고 소현세자는 전주로 피란하였다.


그러나 이괄의 난 등 내부적 혼란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것은 물론 한 차례의 호란 이후에도 합당한 대응책을 세우지 못했다. 그 사이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바꿀 만큼 강성해졌으나 조선은 청의 사신단을 푸대접하는 등 여전히 청에 대한 확실한 입장을 결정하지 못한 채 논쟁 중이었다. 결국 청은 더 이상 형제가 아닌 군신관계를 요구하며 12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에 침입하는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선조와 달리 제대로 도망도 치지 못한 인조는 결국 남한산성에서 무력하게 버티다 결국 세 번 절 할 때마다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찧는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통해 굴욕적으로 패배를 인정하고 만다. 왕으로서 조선 역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일을 겪은 인조는 청에 굴복하는 것을 반대했던 신하들을 싸늘하게 대하며 화를 풀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소현세자 부부와 봉림대군을 비롯한 수백의 조선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으며, 이들은 청에서 노예로 팔리기도 했다. 당시 심양에 있던 노예시장에서는 60만 명 이상의 조선 백성이 거래되었다고 전해지며 운 좋게 고향으로 도망쳐 온 여인들도 '환향녀(還鄕女)'라 불리며 사회에서 냉대 받았다.



4. 아들에 대한 견제



"너는 임시로 세자에 봉했다. 다시는 오지말라." 이 말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선조가 광해군에게 한 말이다. 한양을 떠나면서 급하게 광해군을 세자에 책봉하고 분조를 맡긴 뒤 전쟁 와중에도 거의 2개월에 한 번 꼴로 선위하겠다고 난동을 부려 대신들과 광해군을 무릎 꿇리던 선조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광해군의 문안을 받지 않고 그를 견제했다. 이후 적자이자 장자로 후계자로서의 결함이 없는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아예 대놓고 영창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어해 분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선조가 적통에 대한 집착과 열등감으로 광해군을 괴롭혔다면 인조는 결국 자신의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손자까지 죽음에 이르게 한 장본인으로 알려져 있다. 병자호란 이후 8여 년의 세월을 청에 인질로 잡혀 있던 소현세자는 귀국 후에도 아버지 인조의 냉대 속에 지내다 두 달 만에 돌연사했다. 소현세자가 청 황제에게 받은 벼루와 먹을 진상하자 인조가 이를 집어 던진 일은 이러한 두 사람의 관계를 잘 드러낸다. 청에서도 남다른 수완을 발휘해 요직의 인물들과 사귀고, 신문물을 받아들이며, 농업과 상업에 손을 대기도 했던 세자이기에 혹 청국의 요구로 왕위를 물려줘야하지 않을까 불안해하던 인조가 그 죽음의 배후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끊임 없이 제기되고 있다.

영회원 ©문화재청
소현세자 부인 민회빈 강씨의 무덤이다. 민회빈 강씨는 강감찬의 19대 손녀이기도 하며, 병자호란 때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로 끌려가 많은 고생을 했다. 귀국 후 소현세자가 죽자 인조의 후궁 조씨 등이 민회빈이 소현세자를 독살하고 왕실을 저주한다는 모함을 하여, 궁궐에서 쫓겨나 1646년 사약을 받고 죽었다. 숙종 44년(1718)에 죄가 없음이 밝혀지고 다시 복위되고, 고종 7년(1903)에는 무덤을 영회원이라 부르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인조는 세자가 죽은 뒤 세손을 세자로 명하는 법도를 무시하고, 대다수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쓴 채 봉림대군(훗날의 효종)을 세자로 책봉했다. 그 후 소현세자의 빈 강씨는 물론 그 부모형제까지도 누명을 쓰고 차례로 죽임을 당했으며, 소현세자의 세 아들 중 두 아들 또한 유배 중 의문사 하는 등 일가의 비극이 이어졌다.


과연 수많은 인재를 주변에 두었으나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채 나라를 혼란에 빠뜨린 선조와 자신의 왕위를 유지하는 데에만 몰두하여 결국 아들 일가까지 죽음으로 내몰았던 무능한 인조 중 누가 더 조선 사회에 해악을 끼쳤을까. 이들의 행적은 앞으로도 역사를 통해 끊임 없이 재평가받게 될 것이다.


이 기사는 공공누리, 국립중앙도서관, 국립중앙박물관, 문화재청에서 개방한 공공저작물을 참고하여 작성되었습니다.




iMBC연예 김은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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