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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원익 초상 ©국립중앙박물관 - MBC <화정> 이원익 役 김창완 |
조선 중기의 대표 명신이자 청백리(淸白吏)의 표상으로 일컬어지는 이원익은 87세의 나이까지 장수하며 임진왜란, 인조반정, 정묘호란 등 당시의 주요 사건들을 모두 거친 인물이다. 임진왜란 기간 동안 “경상도의 많은 장수들 중에서 이순신이 가장 뛰어나다”며 이순신을 변함 없이 옹호한 거의 유일한 대신으로도 알려져 있다.
광해군 시기에 전란의 피해를 복구하고 백성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시행된 대동법에도 이원익의 강력한 의지가 반영되어 있었다. 그러나 광해군이 형 임해군을 처형하려고 하자 23차례 사직을 요청해 결국 낙향했으며 인조반정 이후 76세의 나이로 다시 영의정의 자리에 오른다. 인조반정 뒤 광해군을 사사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자 이원익은 자신이 모셨던 주상을 사사한다면 자신도 떠날 수밖에 없다고 맞서 광해군의 목숨을 보호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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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항복 초상 ©문화재청 - MBC <화정> 이항복 役 김승욱 |
'오성과 한음'의 실제 주인공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이항복 역시 조정의 주요 청요직을 거치며 촉망 받았던 관원으로, 특히 임진왜란 당시 외교 분야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펼쳤다. 그는 광해군 집권 10년 후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임해군 처형, 영창대군 살해 등 주요 사안에서 북인과 첨예하게 대립했다. 하지만 이는 당파 논리라기보다는 자신의 뚜렷한 소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일례로 이정구가 이항복을 두고 “그가 관직에 있는 40년 동안 누구 한 사람 당색에 물들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지만 오직 그만은 초연히 중립을 지켜서 당색이란 찾아볼 수 없었으며, 또한 그의 문장은 이러한 기품에서 이루어졌으니 뛰어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라고 평가한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뿐만 아니라 이항복은 뛰어난 기지와 해학으로 인해 흥미로운 이야기를 다수 남겼다. 그 중 하나는 훗날 그의 장인이 되는 권율과의 일인데, 어느 날 이항복의 집에서 자라던 감나무 가지가 담을 넘어가자 권율이 자신의 것이라며 그 감을 따 먹었다고 한다. 그러자 이항복은 권율의 방을 찾아가 방문에 주먹을 찔러 넣고 "그럼 이 주먹은 누구의 것이오?"라고 물으며 권율이 감을 가져간 일을 추궁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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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덕형 초상 ©경기문화재단 - MBC <화정> 이덕형 役 이성민 |
30대의 젊은 나이에 대제학에 이어 영의정까지 지낸 당대 최고의 지성 이덕형은 어려서부터 재주가 있고 침착했으며 문학에 통달했다고 전해진다. 이이 등의 주목을 끌며 승승장구했던 이덕형은 동인의 수장이던 이산해의 딸과 혼인하고 서인이었던 이항복과도 긴밀한 우정을 유지하는 등 당파에 구속되지 않은 인물이었다. 이덕형은 선조를 보필하며 전쟁의 피해를 다스리는데 큰 기여를 하였고 전란 뒤의 민심 수습과 군대 정비에도 힘쓴 덕에 당쟁에 앞장서지 않고서도 최고 자리인 영의정에 오를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