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시작할 무렵부터 볼지 말지 심히 고민했던 드라마를 신나게 뒷북치며 이제서야 보게 됐습니다. 사실 주연인 미우라 하루마(1990년생)는 이름만 들어봤지 잘 모르는 애였고, 그나마 아는 배우는 키치세 미치코(노다메 칸타빌레랑 라이어 게임, 마왕에 출연)와 사토 타케루(루키즈) 정도라 크게 봐야 할 동기가 다가오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이번에도 별 이유도 동기도 없이 보게 되었습니다. 20화 정도가 되면 부담스러워서 시작을 못 했을텐데, 일본 드라마는 대체로 10화 내외에서 끝나기 때문에 크게 부담이 없거든요:) 만화가 원작이라는 이 드라마는, 다소 심각하고 스케일이 큰 주제를 배경에 깔고 있으면서도 만화적인 상상력 덕분에 특유의 재미가 보장되어 있다는 게 특징입니다. 다만 청하는 내내 느꼈던 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나머지 나중에는 힘이 빠질 정도랄까요. 사람을 좀 지치게 만들어요. 그래도 끝까지 얘기가 산으로 가지 않고(가끔 허술한 점도 보이기는 했지만), 캐릭터도 잘 잡혀 있어 결과적으로는 흥미롭게 본 작품이었습니다. 별 기대 안 했는데 젊은 배우들을 다시 보게 된 계기를 주기도 했고 말이죠.
블러디 먼데이(Bloody monday), TBS 토요일 8시 드라마, 2008년 10월 11일~12월 20일 방영
평균시청률 11.35%(비디오 리서치/위키피디아)
슈퍼 고등학생, 블러디 먼데이를 막아라!
홈비디오로 찍힌 듯한 영상에, 크리스마스 날의 러시아 교회에서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리고 한 정보원이 돌연 총격으로 사망하며 남긴 말은, "블러디 먼데이". 이는 국가에 원한을 가져 복수하려는 집단이 일으키는 테러로, 이야기는 세상을 재시작하려는 테러리스트들과 이를 막으려는 공안조직 써드아이의 대립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 안에 조직 써드아이에 힘을 빌려주는 새파란 고등학교 2학년짜리 학생이 있었으니, 평소에 노트북을 들고 다니며 수업도 제대로 안 듣고 어딘가 무기력해보이는 소년 "타카키 후지마루". 그러나 그의 실체는, 전설적인 천재 해커로 불리는 "팔콘"으로 아버지가 소속해있는 조직 써드아이에게 협력을 하게 되는 인물입니다. 머리 좋다는 공무원들도 혀를 찰 정도로 뛰어난 임기응변에 컴퓨터 구사능력, 해킹 능력을 가지고 있어 그야말로 무적의 주인공이라는 말을 뒷받침해주죠.
일단 해커능력이나 다른 능력치는 좋은데 무기력하게 이용당한 게 반 이상(....)이었던 주인공 후지마루 소년
드라마 분위기가 분위기인지라 대체로 인상을 구기고 있는데, 종종 저렇게 환하게 웃기도 합니다:)
이 드라마의 키워드는, 타이틀대로 "블러디 먼데이"입니다. 테러리스트 집단이 자신들의 최종목표를 위해 세운 계획이 바로 블러디 먼데이라는 것이고, 소위 정의의 편에 서 있는 사람들은 그 블러디 먼데이의 실체를 밝히고 그들의 목적을 저지하는데 총력을 기울이죠. 여기서 또 하나 나온 블러디 엑스는 그를 위한 메인 아이템(?)으로, 실제 전쟁에 이용되면 참혹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으로 유명한 살인용 바이러스입니다. 아직 고등학생에 불과한 후지마루는 이 일에 연루되며 차례로 충격적인 반전들을 몸소 겪게 되죠. 그리고, 조금씩 성장해나갑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들어오는 인간성의 회복
아이러니하게도 극한으로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우리는 그 절망적인 상황에 맞서는 인간들의 모습을 보며 "인간"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인간의 이기심에서라면 누구든 떠나버릴 친구들이 오히려 힘이 되어주고, 인간의 이기심으로 보다 안전한 길을 선택할 수 있음에도 "정(正)"을 선택하는 모습에서 결국 우리가 최종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보게 되는 것이죠.
지켜야 할 게 많아 어린 인생이 파란만장한 우리 주인공 소년
그리고 최악의 상황에서, 친구를 위해 위험을 무릅써주는 친구들이라는 존재
여기서 주인공 후지마루는 단 한 가지의 이유로 위험한 일에 자진해 뛰어드는 인물입니다.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고 싶다"는 게 유일한 이유죠. 소중한 친구들과, 그리고 누구보다 사랑하는 여동생. 마지막에 제이가 남긴 대사와 마찬가지로, 무언가를 지키려는 사람은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항상 그 지켜야 할 존재가 발목을 잡게 되어 있거든요. 그러나, 무언가 지켜야 할 게 있는 사람은 다른 의미에서 누구보다 강합니다. "지켜야 한다"는 의지가 있기 때문에 그 의지가 발휘되는 순간 다른 감정이 끼어들 수가 없거든요. 같은 인간이기에,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이기에 위험을 무릅쓸 수 있는 거죠.
그리고 친구들과의 따뜻한 우정. 그런데 이 친구들에 대한 묘사가 좀 부실했던 것 같아요. 사실 이 점이 조금 아쉽습니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친구를 "또 하나의 자아"라고 표현했다고 해요. 이 아이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믿고, 서로의 위험을 진심으로 걱정하며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친구를 위해 뜁니다. 그야말로 누가 봐도 바람직한 우정을 나누는 있죠. 결국 인간은 이기적인 동물이라는 다소 시니컬한 논리보다, 그래도 인간은 함께 의지하고 도와간다는 플러스적인 방향으로 진행되어 개인적으로는 보기가 좋았습니다. 물론, 이들 사이에서도 여러 반전들은 피해가지 않더군요;;
소멸시키려는 사람들, 지키려는 사람들
대충 선.악이 구별되어 있으니 선과 악을 나누어 얘기를 풀어보겠습니다. 일견 복잡해보이는 이야기지만, 여기서 선악구도는 굉장히 심플하게 표현된 편이에요. 특별한 건, 이 드라마 속의 악은 어디까지나 "국가가 만들어낸" 악이라는 점입니다. 국가에게 복수하고 싶다며 원한을 품은 사람들이, 한 사람의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며 하나의 악의 집단이 탄생한 거죠. 수단이 극단적이기는 해도, 최종적인 목표는 "썩어빠진 나라를 쓸어버리고, 처음부터 깨끗하게 다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국가의 곪을대로 곪은 상처가 만들어낸 일종의 결과물인 셈이에요. 그러나 이 사람들은 한 가지 착각을 합니다. 소멸 시작의 칼자루를 쥐고 있다는 이유로, 본인들이 수동적인 인간이 아닌 절대적인 "신"의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죠.
냉정하시지만 고등학생 후지마루를 전폭적으로 신뢰해주는 아저씨와 미스테리어스 팜므파탈 아가씨
소멸시키려는 집단과, 소멸을 막으려는 집단은 팀워크에서도 큰 차이를 보입니다. 일단 소멸시키려는 집단은, 실패를 용서하지 않고 서로를 기본적으로 신뢰하지 않아요.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 "분노"라는 것을 잠재우고 있으며, 불특정의 사람에게 죽음을 선사하는 것에 대해 일말의 가책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악"은 그저 나쁜 것을 악이라 칭하는 것이 아니라, "선"이 결여된 것을 "악"이라 정의한다는 말이 있는데요. 이 사람들은 그 "선"이 결여된 예를 그야말로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 "사랑"이라던가 "신뢰"같은 게 결여되어 버린 것이죠.
그리고 소멸을 막으려는 집단은, 탁상머리에 앉아 물정도 모르고 답답한 소리만 하고 있는 양반네들을 제외한 실질적 행동파 팀들에게만 제한하겠습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서로를 신뢰하며, 실패나 배신을 용서할 줄 알고 무언가를 지켜야한다는 사명감이 강한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어요. 그래서 끝까지 서로를 챙겨주고 용기를 주는 훈훈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스스로도 성장을 하고, 서로에게도 성장의 계기를 주지요.
계속되는 이야기, 그리고 새로운 시작을 향해
이 드라마는 명확한 결말을 내는 것보다, 내내 보내주던 메시지를 그대로 유지하며 현재진행형 마무리를 선택합니다. 사실 어린이 프로그램처럼 선은 이기고 악은 멸망했도다!....라며 끝나면 얼마나 시원하고 좋겠냐만은, 슬프게도 현실은 그러기가 힘들죠. 언제 어디서든, 악은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며 생존하고 반복되기 마련입니다. 근절하기가 힘들죠. 부조리한 세상에 억울함을 품은 사람들이 언제 또 나타나, 소멸시키려는 집단 속에 들어가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그나저나 큰 사단이 날 뻔 했는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일상으로 돌아와버리는 걸 보며 반복의 가능성을 느껴야 했습니다.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오다
절박한 상황에서 인간을 잃어버린 사람들과, 그래도 인간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언제 또 대립할지 모르는 불안하기 짝이 없는 현실. 모두가 변화를 꾀하지 않는 이상, 이런 전쟁은 끊임없이 반복되겠죠. 그래도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건, 그 현실 속에서 어떻게든 무언가를 지켜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인지 마지막에는 불안한 현실의 반복과, 새로운 시작에 대한 희망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습니다.
THE FINISH
━━━━━━━━━━━━━━━━━━━━━━━━━━━━━━━━━━━━━━━━━━━━━━━━━━━━━━━━━━━━━━━━━━━
사실 몰입도가 좋았던 건 초반 정도였습니다. 중반 정도에는 워낙 반전에 반전에 반전에 반전, 반전 또 반전을 거듭하는 소위 반전 드라마라(...) 좀 힘이 빠져버리는 면도 없지 않아 있었거든요. 다만 오랜만에 본 외국 드라마인지라 최근에 업데이트된(?) 배우들을 확인하는 계기는 되었던 것 같습니다. 미우라 하루마같은 경우는 별 기대를 안 했는데 가능성을 보여줬고, 사토 타케루도 자기 역할을 잘 해냈고 나머지 배우 분들도 괜찮았어요.
연출 부분은 반복성이 좀 느껴졌는데, 딱히 나쁘다고 할 건 없었지만 반복되더라도 좀 다채로운 화면을 보여줬으면 하는 아쉬움도 남더랍니다. 주인공 주변 캐릭터들도 약간 얘기를 하다 만 느낌이고, 이야기 진행도 스케일은 큰데 어딘가 협소한 느낌이었달까요. 다만, 이런 소재의 드라마를 만들어냈다는 시도 자체가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요즘 한국 드라마가 막장 내지는 통속극으로 가버려서 도저히 버닝이 안 되던 터라 궁여지책으로 예전에 볼까 말까 했던 걸 본 건데, 결론은 잘 본 것 같아요. 나름 신선했거든요(웃음) 젊은 배우들 정보도 오랜만에 업데이트했고 말이죠. 어쨌든 조금 색다른 소재의 드라마를 한 번 보고 싶으신 분은 시도해보셔도 좋을 듯 하네요. 간만에 재미있게 본 드라마였습니다.
해왕성에서 마실 나온 판야의 두 번째 은신처(2008.12.29 작성)
//tvlog.tvian.com/pany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