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파 방송 드라마 주연 여배우들의 연령대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이 현상을 두고 20대 초반의 여주인공을 주축으로 한 멜로 일색에서 벗어나 드라마의 소재나 캐릭터의 스펙트럼이 넓어졌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연륜과 개성을 갖춘 30~40대 여배우들이 미모와 패기의 20대와 정면승부하기 시작했다는 방증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드라마가 변화하는 여성상을 언제나 타 매체보다 발 빠르게 반영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미모나 젊음만을 여성의 경쟁력으로 인정하던 사회적 시선의 변화 역시 반갑다. 그런데 30~40대 여배우들이 맡는 역할에는 배우별로 차이가 발견된다. 김지현 기자 | 이미지제공 MBC, KBS
성공적으로 가정에 안착
90년대 트렌디 드라마에서 여자 주인공들은 아직 남자들의 세계에서 보호받거나 귀여움 받는 청순가련하거나 톡톡 튀는 존재였다. 혹은 속 깊고 헌신적인 맏딸의 이미지이거나. 하희라, 김희애, 유호정, 오연수, 신애라 등 그 시절의 여배우들은 전성기에 연예인 혹은 유명인과 결혼해 대외적으로 큰 부침 없이 성공적으로 가정에 안착했다. 그들의 결혼 생활은 일거수일투족 시청자들의 관심을 모았고, 그때부터 그들은 CF나 신변잡기식 아침 프로그램 등에서 부각되는 ‘가정’의 이미지로 소비되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손에서 남편의 손으로 건네지는 신부처럼 지극히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수순을 밟는 것이 실생활뿐 아니라 역할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그들은 여전히 청순가련하거나 톡톡 튀거나 속 깊은 ‘주부’ 혹은 ‘엄마’ 혹은 ‘맏딸’의 역할을 맡는다. 지금 <밥 줘>에서 하희라가 연기하는 조강지처의 이미지나 <사랑은 아무나 하나>에서 유호정의 똑순이 주부 역할처럼, 이들은 홈드라마 속에서 지극히 자연스러워 보인다.
도회적 이미지에서 친근한 이미지로 변신
좀 더 흥미로운 것은 신은경과 김남주의 행보다. <종합병원>에서부터 크게 주목받은 신은경은 중성적이고 파워풀한 이미지였다. 주부의 역할을 맡을 때조차 <미스터 주부 퀴즈왕>에서처럼 전업주부 남편을 둔 능력 있는 커리어우먼이거나 ‘조폭’ 마누라일 정도로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그 이미지는 최근 <엄마가 뿔났다>에서의 변호사 큰딸 역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이미지를 견고히 하거나 확장하지 않고 아침 드라마 속의 연약하지만 헌신적인 전통적 여성상을 택했다. 이것이 2008년 이혼 이후 처음으로 한 선택이었다는 점은 최진실이 이혼 후 재기에 성공하게 한 것이 <장밋빛 인생>에서의 억척스러운 주부 역할이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김남주의 경우, <도시남녀>로 대표되는 도회적 이미지가 강했으나 결혼 이후 <그놈 목소리>에서의 모성이 부각되는 아이 엄마 역할로 복귀했고 <내조의 여왕>에서 사랑스러운 주부 역으로 인기몰이를 했다. 이 두 배우의 캐릭터 변화는 나이에 따른 자연스러운 변화일 수도 있겠으나 사생활과 캐릭터의 변화가 맥락을 같이 한다는 점에서 강한 개성을 잃고 사회에 안전하게 편입되는 것 같아 안타까운 면이 있다.
나이 많은 독신녀의 개성
비슷한 또래의 김선아와 엄정화는 ‘가정’에서 벗어나 독특한 자신의 캐릭터를 구축하고 있는 배우들이다. 그런데 이 두 배우가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점은 생각해 볼 만하다. <결혼 못하는 남자>에서 엄정화는 <싱글즈>를 비롯한 여러 영화에서 보여준 독신 커리어우먼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오로라 공주>나 <호로비츠를 위하여> 같은 몇몇 영화를 제외하면 그녀는 나이가 꽤 많지만 인생을 즐길 줄 아는 세련된 골드미스의 이미지를 가장 많이 보여준다. 엄정화가 <아내>나 <12월의 열대야> 등의 드라마에서 주부 역할을 맡더라도 신선하게 느껴지거나 이제 나이에 맞는 역할을 맡았다는 느낌보다는 다양한 역할을 소화한다고 여겨진다.
김선아 역시 영화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지만 김선아가 좀 더 빛을 발하는 것은 드라마 속에서 자신의 나이 또래의 여성들의 공감을 강하게 얻는 역할을 맡았을 때다. 심지어 <시티홀>은 김삼순의 성장한 모습같이 여겨진다. 김선아의 친구 같고 털털한 이미지는 다른 노처녀 캐릭터와 차별성을 띠고 ‘김선아형 독신녀’의 캐릭터를 꾸준히 쌓아가고 있다.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 고현정
고현정은 조금 다른 지점에 서 있다. 그녀는 결혼으로 은퇴를 선언함으로써 <모래시계>의 청순한 이미지로 봉인되었고, 10년 후 복귀작 <봄날>에서 비슷한 이미지를 재생산하는가 싶었다. 그러나 이후 홍상수 감독의 영화와 <히트> <여우야 뭐하니>를 거쳐 <선덕여왕>까지, 사랑이나 가정의 문제를 넘어서 한 인간의 개성을 강하게 보여주는 여성 캐릭터를 맡아 열연하고 있다.
고현정의 미실과 더불어 ‘여성 지도자’ 캐릭터가 득세하고 있는 사극은 가정이나 사랑에 초점을 맞추지 않은 신선한 여성상을 그려 여성 캐릭터의 지평을 넓히고 있다. <애정의 조건> 등 이혼녀나 주부 역할을 맡아야 했던 채시라가 <천추태후>에서 전혀 다른 면모를 보일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사실 지금까지 한국 드라마가 남녀나 가족관계에 초점을 맞춰온 탓에, 여성 캐릭터뿐 아니라 남성 캐릭터 역시 전형적이거나 제한적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30~40대 남성 배우들이 사생활과 무관한 역할을 맡는 것과 다르게 현재 맹활약하는 30~40대 여배우들이 맡은 역할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생활로 형성된 이미지가 드라마 속 역할에 반영되거나 역할 선택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 드라마의 소재나 캐릭터의 지평이 조금 더 넓어지고, 시청자들의 사회적 시선이나 편견도 변화해, 결혼 여부나 출산/육아의 공백, 이혼 등의 사생활과 상관없이 자신의 고유한 캐릭터를 활용하거나 적극적으로 변신할 수 있는 여배우들이 늘어나는 것이 시청자들에게도 훨씬 즐거운 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