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과 함께 익숙한 체취의 캐릭터들이 안방극장에 스며들었다. 수·목에는 삶에 지친 아저씨들이 술잔을 기울이고, 금·토 밤이면 밥 잘 사주는 회사원 누나와 아는 동생이 투닥투닥 썸을 타며, 주말마다 전국에서 제일 바쁜 지구대 경찰들의 생생한 일상도 눈 앞에 펼쳐지고 있기 때문. 이처럼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는 드라마들은 자극적이고 강렬한 장르물이나 거창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는 판타지물은 아니지만 우리 주변에 있을 법한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로 공감대를 자아낸다.
가장 먼저 출발을 알린 건 tvN '라이브'였다. '라이브'를 집필한 노희경 작가는 상처가 많고 모난 캐릭터들이 서로 부딪치며 부족한 부분을 채워가는 이야기의 대모답게 이번에도 따뜻하고 섬세한 손길로 경찰들의 세계를 담아냈다. 일각에서는 경찰 미화 드라마라는 비판도 있지만, 이는 그동안 다뤄지지 않았던 직업세계의 이면을 그만큼 매력적으로 소개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특히 '라이브'는 으레 경찰드라마라면 사건 중심으로 전개될 것이라는 편견을 깨고 철저하게 캐릭터 중심으로 사건들과 마주한다. 주인공이 멋지게 사건을 해결하는 그림을 위해 경찰이라는 직업을 부여한 것이 아니라, 주인공들이 우연히 경찰이라는 직업을 택한 뒤 그 안에서 그저 살아나가는 이야기인 것. 그 덕분에 경찰이 아닌 직업을 가진 시청자들도 단순히 경찰이라고 뭉뚱그려 소개할 수 없는 한 명 한 명의 인물들과 매주 만나 소통하고, 그들의 일상에 빠져들 수 있었다. 이들이 사건을 해결하고, 점차 경찰로서 성장하는 모습은 판타지일지언정, 동네 어디엔가 한정오(정유미)와 염상수(이광수)가 사수들에게 혼나면서도 달리고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드는 이유다.
tvN '나의 아저씨'는 좀 더 지독한 현실 속으로 우리를 이끈다. 하루를 버틴다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인물들은 매일 술, 아니 소주를 부르는 일상 속에 갇혀있다. 집에서도 기댈 곳 없고, 아내는 바람 나고, 회사에서도 치이는 박동훈(이선균)은 주인공임에도 연민 그 자체. 나머지 아저씨들의 사정도 더 심하면 심했지 나을 것이 없다. 그렇다고 대단히 희망찬 존재가 분위기를 전환시켜주지도 않는다. 홀로 병든 할머니를 부양하며 사채업자에게 쫓기는게 일상인 이지안(이지은)이 또 다른 삶의 무게를 더할 뿐이다.
심지어 '나의 아저씨'는 억지로 이들의 처지를 반전시켜주거나 위로하지도 않는다. 사실 나아지리란 희망도 딱히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 아저씨들의 삶은 드라마 속에서는 그렇게 흔한 능력자나 재벌 2세의 삶보다 우리에게 더 가깝다. 대다수는 아저씨처럼 욕하는 걸 듣고도 뺨을 때리기보다는 모른 척 하는게 미덕인 세계에서 살고 있기에, 서로 묵묵히 건네는 소주 한 잔의 의미에 깊이 공감하며 이들을 응원하게 되는 것. 이들이 갑자기 거짓말처럼 가정과 사회 모두에서 대단한 사람이 될 수는 없겠지만, 그저 조금 더 웃을 일이 많아지길 바라는 시청자들의 마음도 함께 서서히 치유받길 기대해본다.
JTBC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는 한층 말랑말랑한 일상에 시청자들을 끌어들이며 연애 세포를 일깨우고 있다. 친구 동생과 누나 친구의 비현실적인 미모를 제외하고는 여느 회사 건물에나 있을 법한 직장인 연상연하 남녀의 썸 그 자체를 보여주기 때문. 잔소리 하는 부모님도, 찌질한 전남친도, 잘못을 떠넘기는 상사도 지극히 평범해서 쉽게 아는 얼굴들을 떠올릴 수 있을 정도다. 그 덕분에 시청자들은 친한 친구의 연애담을 듣는 것처럼, 지인의 일상을 엿보는 것처럼 흥미롭게 이들의 세계를 관찰하게 된다.
독특한 점은 이미 답이 정해져있는 드라마라는 것. 이변이 없는 한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의 엔딩은 진정한 사랑을 찾은 윤진아(손예진)와 서준희(정해인)의 행복한 모습일테니 말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미 사랑의 기승전결을 다 겪어보고도 다시 새로운 사랑을 꿈꾸며 설레듯,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역시 결말을 뻔히 알면서도 그 과정의 행복감을 기대하게 하는 매력으로 시청자들을 사로잡는다.
분명 죽고 살만큼 급박한 문제가 걸려있거나, 하루라도 안 보면 전개를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감도 아닌데 이들이 오늘은 무슨 이야기를 나눌지, 어떤 일상을 겪었을지 괜스레 궁금하게 만드는 드라마 세 편이 함께 방송 중인 요즘이다. 때로는 팍팍한 현실을 너무 파고들어 아프고, 때로는 단비 같은 달콤함을 선사하기도 하는 이들과 함께 일상같은 드라마, 드라마같은 일상을 만끽해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