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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정실록] 9세의 영창대군은 어떻게 증살(蒸殺)당했나

MBC 창사 54주년 특별기획드라마 <화정>과 함께 하는 조선시대 역사 읽기. 두 번째로 영창대군의 죽음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봅니다.




뜨...뜨거워!


정명공주의 불길한 예감이 현실로 이어졌다. 뜨거운 햇빛에 현기증을 느낀 정명공주는 바로 동생에게 달려갔지만 이미 영창대군은 역모죄로 끌려가던 중이었다. 때는 1613년, 영창대군의 나이는 고작 8세였다.



선조와 왕비 인목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영창(1606∼1614)은 선조의 14명의 아들 중 유일한 적장자인 대군이었다. 이때 선조의 나이는 55세, 인목왕후의 나이 23세, 그리고 광해군의 나이 32세였다. 광해군은 선조의 후궁이 낳은 아들로, 임진왜란(선조25년~31년, 1592~1598)이 터진 직후 세자가 되었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끝난 뒤 인목왕후가 영창대군을 낳자 선조는 마음이 흔들리고, 영창을 왕위로 올리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광해군 역시 선조의 특별한 총애와 소북파(小北派)의 지지를 받으며 세자로 책봉될 가능성이 많아진 영창을 의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영창의 나이가 너무 어렸고, 병세가 심각했던 선조가 갑작스레 죽음으로써 영창의 세자 책봉은 실현되지 못했다.



그러다 광해군 즉위 후 ‘7서의 옥’이 일어났다. ‘7서의 옥’은 소양강을 무대로 시와 술을 즐기던 서양갑·박응서 등 명문가의 서자 7명이 역모를 꾸몄다 하여 옥에 갇힌 사건이다. 그러자 광해군을 지지하던 대북파(大北派) 이이첨 등은 이들로 하여금 영창대군 추대음모를 거짓 진술케 함으로써 배후에 인목대비의 부친 김제남과 영창대군이 있다고 모함한다. 이에 김제남은 사약을 받는 극형에 처해지고 영창대군은 평민으로 강등, 강화도로 유배된다. 이것이 바로 계축년(1613)에 일어난 계축옥사이다.



자네 말대로 문경에서 아주 재미있는 일이 있었더군.
은을 거래하던 은상들이 털렸는데 뭐 단순한 도적질이지.
헌데 그 도적놈들이 아주 특이해. 잘 만들면 그림이 되겠어.


전하께서 쉽게 움직이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임해군을 죽인 일을 아직도 상처로 안고 계세요.



계축년 모월모일. 박순의 서자 박응서와 서익의 서자 서양갑을 비롯한...심우영, 이경준, 박치인, 박치의, 김평손 등 반가의 서자 7인은 반 정의 모의를 준비하였다. 이로써 먼저 문경의 은상을 탈취해 거사 자금을 마련하여 거병을 하고자 했으니 이는 부원군 김제남과 합하여 혼군(昏君)을 끌어내리고 영창대군을 옹립하기 위함이었다.





위험한 곳에 서려 했구나. 너한테는 너무 높은...
내가 무서우냐. 그래, 나도 그렇단다. 이렇게 작고 어린 네가...



『광해군일기』에 따르면 임해군과 영창대군은 귀양 후 각각 이정표, 정항에 의해 살해됐다. 영창대군이 강화도에 이르자 삼엄한 감시는 임해군 때보다 배는 되었고 이정표는 기회를 엿보며 영창대군을 살해하고자 했다. 이에 광해군은 특별히 영창대군을 보호할 것을 청하였고 홍유의는 "이의(영창대군)가 진실로 죄인이다. 그러나 상이 우리들을 보낸 것은 지키라고 한 것이지 살해하라고 한 것은 아니다."고 하였다. 이에 이정표도 처음에는 감히 흉악한 짓을 행하지 못했으나 정항이 강화 부사로 도임한 뒤부터는 영창대군에게 양식을 주지 않았고, 주는 밥에는 모래와 흙을 섞어 주어서 목에 넘어갈 수 없도록 하였다. 침상에는 불을 때서 눕지 못하게 하였는데, 알려진 바대로 영창이 창살을 부여잡고 서서 밤낮으로 울부짖다가 기력이 다하여 죽었다고 전해진다.

한편, 『인조실록』에는 광해군의 밀명을 받은 이정표가 음식에 잿물을 넣어 영창대군을 죽게했다는 기록도 있다. <화정>은 그 당시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기 보다는 9세의 나이로 증살(蒸殺)당한 영창대군의 비극을 함축적으로 드러내며 눈길을 끌었다.

대비는 영창대군에게 옷을 지어 보내며 피로 적은 위문의 글을 몰래 전하기도 했다. 영창대군은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대비의 마음을 아프게 할까 염려하여 괴로움을 말하지 않았다고 하며, 스스로 죄인이라 하여 상복도 입지 않았다. 사람됨이 영리하였던 그의 죽음을 듣고 불쌍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영창대군의 묘(경기도 안성) ©문화재청


그러나 광해군과 영창대군의 운명은 이후 한 차례 더 큰 변화를 맞이한다. 1623년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가 왕이 되는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광해군은 강화와 제주도에 유배되고 영창은 복직된 것. 인조는 영창의 무덤을 왕자의 예로 다시 이장하고 당시 우의정이던 신흠에게 묘지명을 짓게 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영창대군의 묘지명. 영창대군증시소민공지묘(永昌大君贈諡昭愍公之墓)라는 명문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영창의 무덤은 남한산성 아래에 안장되었다가 성남시 개발계획에 의해 경기도 안성시로 옮겨졌다. 이 과정에서 묘지명이 미처 수습되지 못했다가 이후 도시가스 시설 공사 도중 영창의 비극적인 운명처럼 파손되어 발견되었고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기사는 국립중앙박물관, 문화재청, 공공누리, 공유마당에서 개방한 공공저작물의 자료를 참고하여 작성되었습니다.



iMBC연예 김은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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