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 팬에게 유독 사랑받는 배우가 있다. 제프리 딘 모건도 그중 한 명이다. 그는 1990년부터 지금까지 40여 편의 TV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한 중견배우지만 한국에 소개된 작품은 얼마 없다. 잘 알려진
데니는 매회 스쳐 지나가는 <그레이 아나토미> 속 환자들과는 달랐다. 그는 튼튼한 심장만 있으면 세상 부러울 게 없는, 잘생기고 성격 좋고 돈 많은 남자다. 지긋지긋한 병원 생활에도 미소를 잃지 않으며 한 가닥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데니에게 박애주의자 이지(캐서린 헤글 분)는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데니 역시 태양처럼 빛나는 이지를 사랑하게 된다. 병실에서 스릴 있는 데이트를 즐기며 둘은 급기야 결혼을 약속하는 사이로 발전한다. 언제 심장이 멈출지 모르는 환자와 건강한 의사였지만, 두 사람은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하지만 시즌2의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데니는 결국 눈을 감고, 아름다운 한 쌍의 결혼을 꿈꾸던 시청자를 펑펑 울렸다. 시즌3로 접어든 <그레이 아나토미>는 안타깝게 떠난 데니로 인해 극심한 슬픔에 빠진 이지의 모습으로 또다시 보는 이의 가슴을 시리게 했다(제59회 에미상은 캐서린 헤글의 열연에 조연상을 안겨줬다).
데니라는 캐릭터가 워낙 인상적이었기 때문인지 <그레이 아나토미> 제작진은 이지의 회상 신과 죽을 고비를 넘긴 메레디스(엘렌 폼페오 분)의 꿈에 데니를 종종 등장시키더니 급기야 시즌5에 이르러선 이지의 환영 장면에 고정출연시키기에 이르렀다. 제프리 딘 모건이 ‘유령’ 데니로 <그레이 아나토미>에 계속 출연하고 있는 것이다. 알렉스(저스틴 챔버스 분)와 다시 사귀기로 한 이지는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는 데니의 환영으로 인해 고민에 빠지며, 여전히 데니를 잊지 못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이쯤 되면 데니를 너무 ‘우려먹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인상을 찌푸릴 시청자도 적지 않을 것이다.
어찌됐든 죽어서까지 이지의 마음을 흔들어놓는 데니, 제프리 딘 모건은 이렇게 ‘애틋함의 아이콘’이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데니 이전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레이 아나토미>에 참여하기 전인 2005년 드라마 <위즈>에서 그는 주인공 낸시(메리 루이즈 파커 분)의 죽은 남편으로 출연했다. 행복한 중산층 주부 낸시는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두 아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이 된다. 결국 돈을 벌기 위해 마약 딜러의 세계에 빠져든 낸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는 시련 속에서 죽은 남편을 원망하고 그리워하며 마음을 다잡는다. 제프리 딘 모건은 <위즈>에서 생전에 찍어놓은 비디오테이프와 액자 속 사진으로만 등장해 애틋함을 유발했다. 비슷한 때 출연한 드라마 <수퍼내추럴>에선 주인공 형제의 실종된 아버지로 출연해 애틋한 가족애를 보여주기도 했다.
이처럼 제프리 딘 모건은 보는 이를 강렬하게 압도하는 주인공이라기보다 아련하게 가슴을 파고드는 조연 캐릭터로 잊지 못할 인상을 심어줬다. 선 굵은 외모와 부드러운 미소, 중저음의 나긋나긋한 음성을 지닌 훈훈한 ‘미중년’이자 뒤늦게 발견된 TV스타로서 미국 드라마 팬들에게 조용히 사랑받던 제프리 딘 모건이 3월 개봉한 두 편의 영화 <왓치맨>과 <뉴욕은 언제나 사랑 중>으로 색다른 매력을 뽐내고 있다. <그레이 아나토미>로 인지도가 생긴 후인 2008년에 영화
먼저 3월 5일 개봉한 <왓치맨>에서 제프리 딘 모건은 몰라볼 정도로 ‘파격 변신’을 했다. 영화를 여는 인물 ‘코미디언’이 된 모건은 환자나 망자가 아닌 근육질 마초로서, 반항기 가득한 눈빛과 음흉한 웃음으로 안티히어로의 면모를 거칠게 표현해 냈다. 사회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힘을 과시하고 파괴를 일삼으며, 사랑하는 여인에게 상처를 입히는 코미디언의 모습에선 그간 제프리 딘 모건이란 배우가 몇 편의 유명한 TV드라마에서 보여줬던 신사적이고 아련한 이미지를 조롱하고 전복시키려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훈훈한 남자에서 흉포한 남자로의 변신. 우스꽝스러운 유니폼과 가면으로 씁쓸한 코믹스 영웅이 된 제프리 딘 모건을 만나는 건 유명 그래픽노블을 영화화한 <왓치맨>의 다양한 볼거리 중 하나다.
3월 12일 개봉한 로맨틱 코미디 <뉴욕은 언제나 사랑 중>의 모건도 새롭다. 여기서 그는 우마 서먼, 콜린 퍼스라는 무비스타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삼각관계의 한 축을 든든하게 이룬다. 유명한 연애상담가 엠마(우마 서먼 분)와 사고처럼 사랑에 빠지는 패트릭이 되어 ‘훈남’으로서의 이미지를 어느 정도 유지하면서도 축구에 열광하는 소방대원으로서 악동적인 면모를 더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러브스토리를 흥미롭게 만들어 나간다. 엠마의 충고 때문에 약혼녀가 자신을 떠났다고 여긴 패트릭은 컴퓨터 해킹으로 엠마와 혼인신고를 해버리는 귀여운 복수를 감행한다. 또 그것을 전산오류로 믿고 무효처리를 해달라며 자신을 찾아온 엠마를 고주망태로 만들어버린다. 그러나 오해가 인연을 부르고 싸우면서 정드는 로맨틱 코미디의 공식을 차근차근 밟으며 두 사람은 사랑에 골인하게 된다. <뉴욕은 언제나 사랑 중>은 물론 그동안 수없이 봐왔던 할리우드 로맨틱 코미디 수준에서 벗어나지 않은 범작이지만, ‘로맨틱 코미디의 왕자’ 콜린 퍼스를 들러리로 만든 제프리 딘 모건의 활약만큼은 인상적이다.
그는 여전히 촬영 중이다. 현재 제작되고 있는 작품만 해도 다섯 편. 40대 중반에 접어든 모건은 쉼 없이 연기 활동을 하며 튀지 않게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연기파 배우도, 대스타도 아닌 훈훈한 배우 제프리 딘 모건. 앞으로 그가 출연한 영화와 드라마를 한국에서 더 많이 접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정미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