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창사 54주년 특별기획드라마 <화정>과 함께 하는 조선시대 역사 읽기. 여섯 번째로 광해군의 실제 모습과 업적에 대해 다룹니다.

제가 전하와 다른 게 싫으셨던 걸 압니다.
저는 전하처럼 무능하지 않으니까.
예, 다릅니다. 저는 전하와는 다른 임금이 될 것입니다.
이제 이 나라의 왕은 접니다. 아버지.인조반정으로 축출되며 결국 묘호조차 갖지 못한 왕으로 역사에 남았지만 당시 조선에서는 파격적이었던 여러 행보로 인해 현대에 들어 끊임 없이 재조명되고 있는 인물 광해군. <화정> 역시 백성과 나라를 생각하는 인간적인 왕이면서 반대 세력을 제거해서라도 뜻을 관철시키고자 하는 강력한 군주를 꿈꾸었던 광해군의 양면적인 모습을 고스란히 그려내고 있다.

『공사견문(公私見聞)』에서는 "광해가 세자가 된 것은 순전히 말에 힘입었다."고 전한다. 선조가 세자를 정하기 위해 여러 왕자에게 던진 질문에서 광해군이 가장 높은 점수를 얻었다는 것. 일례로 보물을 성대하게 진열해 놓고 마음대로 취하도록 하니 다른 왕자들은 서로 다투어 보물을 챙기는데 유독 광해군은 붓과 먹을 가졌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반찬 중에서 무엇이 으뜸이냐?"는 선조의 질문에 광해군은 소금이라고 대답하며 "소금이 아니면 온갖 맛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결국 임진왜란 시기 급하게 세자로 책봉된 광해군은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왕의 권한이 분할되었던 분조(分朝, 임진왜란 때 세운 임시 조정)의 중심에 서서 전쟁에 한창인 남쪽으로의 전진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는 조정의 건재함을 알리고 흩어진 사대부와 의병들을 규합시키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 이때 광해군이 직접 목격한 백성들의 생활상은 이후 그가 개혁적인 정책을 추진하게 되는 배경이 된다.

허나 나는 도탄에 빠진 백성을 외면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동법을 시작할 겁니다.
없는 백성이 아닌 있는 양반들이 내야지요.
난 그들의 돈으로 백성을 구제하고 나라를 일으켜 세울 겁니다.광해군 원년(1608)에 경기도 일대에서 시작된 대동법은 각 지방의 특산물을 공물(貢物)로 바치던 것을 쌀로 통일하고, 소유한 토지에 비례하여 과세하도록 한 제도다. 이전의 공물제도는 각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게 하였는데, 부담이 불공평하고 수송과 저장에 불편이 많았다. 또한 일종의 청부업인 방납이 성행하면서 방납인들이 중간에서 폭리를 취해 그 이익을 권력자에게 상납하는 폐단이 이어졌다.
앞서 임진왜란 당시에도 유사한 문제제기가 있었으나 반발이 너무 심해 금세 사라진 바 있던 이 법은 광해군 대에 영의정 이원익이 적극적으로 주창하여 재실시될 수 있었다. 이후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확대되기까지는 100년의 시간이 더 걸렸지만 그 출발점이 되었다는 의미를 찾을 수 있다.
 |
대동법시행기념비 ©문화재청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맨위에 머릿돌까지 갖춘 모습으로, 각 부분의 조각은 형식에 그친 감이 있다. 비의 원래 명칭은 ‘김육대동균역만세불망비(金堉大同均役萬世不亡碑)’또는 ‘호서선혜비(湖西宣惠碑)’이다. 비문은 홍문관 부제학을 지내던 이민구가 짓고, 의정부 우참찬 오준이 글씨를 썼다. |
뿐만 아니라 광해군은 명나라와의 관계에서도 이전의 왕들과는 사뭇 다른 태도를 취한다. 명과 후금의 사이에서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았다고 하여 '실리 외교' 혹은 '중립 외교'로 칭해지는 광해군의 대외정책은 <화정> 속에서 '망궐례(望闕禮)' 거부를 통해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망궐례란 설날, 동짓날, 중국 황제의 생일에 왕을 비롯한 문무관원들이 중국 궁궐을 향해 드리는 예를 일컫는다.
실제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망궐례는 광해군 5년(1613) "흙탕물 때문에 예를 거행할 수 없어" 임시 정지된다. 또한 광해군 13년(1621)에도 “정조(正朝)에 행하는 망궐례와 본조에서 거행하는 진하(陳賀)를 모두 우선 정지하도록 하라.”라며 비밀리에 비망기에 이른 내용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경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대의와 의리를 좇아 말하리다.
나에게 대의는 명국의 안위가 아닌 내 나라 조선의 안위요,
또한 내가 지켜야 할 의리는 명국의 것이 아닌 내 백성의 목숨이오.명의 파병요구에 대해서도 광해군은 신중하게 대응하고자 한다. "명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라고 주장하는 신하들에게 "다시는 은혜니 배반이니 그런 말 하지 말라."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결국 명의 압박에 한 차례 만 이천명의 병사를 보내지만 강홍립에게 "형세를 봐서 적당히 투항한 뒤 후금에게 우리 측의 난처한 처지를 설명해 오해가 없도록 하라."는 밀명을 내린다. 결국 이 군사들은 단 두 번의 전투 끝에 모두 후금에 투항하며 피해를 최소화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광해군의 선택은 당시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고, 이는 지지세력이었던 대북파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점차 광해군은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후 광해군이 맞이하게 되는 비극적 최후는 역설적으로 그의 공(功)을 현대적 입장에서 재조명하고자 하는 의욕을 불러 일으켰다. 기록의 상당 부분이 반대세력에 의해 새롭게 쓰여지거나 삭제되었지만, 또 이러한 기록들 사이에 가려져 있던 틈새가 후대인들 의해 복원되고 있는 것. 이는 아마도 남다른 영특함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는 실패한 왕으로 남은 광해군이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여전히 많은 점을 시사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기사는 공공누리, 국립중앙박물관, 문화재청, 경기문화재단, 한국고전번역원,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개방한 공공저작물을 참고하여 작성되었습니다.
iMBC연예 김은별
※ 이 콘텐츠는 저작권법에 의하여 보호를 받는바, 무단 전재 복제, 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