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정실록] 정말로 조선통신사는 국수 먹는 것까지 기록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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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창사 54주년 특별기획드라마 <화정>과 함께 하는 조선시대 역사 읽기. 네 번째로 조선통신사와 관련된 이야기를 풀어봅니다.




잠시만, 난 기록해야 할 게 있소.


아 참, 종사관으로 오셨댔지. 종사관은 통신사행에서 지역 풍물 같은 걸 기록해가야 하니까.


<화정>에서 종사관으로 조선통신사에 파견되어 온 홍주원은 왕의 밀명을 수행하는 틈틈이 에도(도쿄)의 풍속을 체험하고 기록한다. 이러한 통신사의 역할을 잘 알고 있었던 정명 역시 적극적으로 그를 돕는다. 물론 일본에서의 주원과 정명의 이야기는 모두 작가적 상상력의 산물이다. 그렇다면 드라마 상에서는 정명의 비극적 운명을 부각시키고 주원과의 운명적 재회를 위한 장치로 사용된 ‘조선통신사’의 실제 모습은 어떠했을까.


국서누선도 ©국립중앙박물관
통신사 일행이 탄 배가 조선 국왕의 국서를 받들고 오사카의 요도가와 강을 지나는 장면의 그림이다. 맨 앞에 부사선(副使船)이 나오고, 다음에 국서를 받든 정사가 타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국서선(國書船), 그리고 종사관선(從事官船)이 뒤를 잇고 있다. 국서선과 종사관선의 앞에는 예인선, 뒤에는 수행선(隨行船)이 동반하였다. 조선 측 악대(樂隊)의 선상 연주 모습이 그려져 있으며, 사공들은 모두 일본인이다. 조선 측 인물들은 모두 수염을 그려 넣은 것이 인상적이다. 정확히 어느 시기의 통신사를 묘사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며, 막부의 어용화가가 그린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조선통신사는 임진왜란 이후 일본 에도막부의 요청에 의해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200여 년에 걸쳐 12차례 파견되었던 조선왕조 사절단으로, 양국 간 외교와 문화교류에 큰 역할을 수행하였다. 조선통신사는 정사(正使)•부사(副使)•종사관(從事館)의 삼사(三使)이하, 화원(画員)•의원(医院)•역관(駅官)•악사(樂士)등 500여 명에 이르는 대 사절단으로, 조선의 수도 한양을 출발하여 일본의 수도인 에도까지 6개월 이상이 소요되는 긴 여정이었다. 일본인들은 이러한 수행원들을 열렬히 환영하였으며 이들로부터 글과 글씨, 그림 등을 얻기 위해 조선통신사가 머무는 숙소에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동래부사접왜사도 ©국립중앙박물관



그러다 선조 때 일본이 저지른 임진왜란, 정유재란으로 인해 상호교류가 끊어지게 되면서 조선통신사 역시 중단된다. 하지만 이후 광해군 원년(1609)에 체결된 기유조약 이후 일본이 조선에 사절파견을 요청하면서 광해군 9년(1617) 조선통신사가 재개된다.

큰 전쟁을 겪은 이후 이러한 양국의 행보가 언뜻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사실 이때 통신사의 파견은 긴밀하게 얽혀있었던 양국의 이해관계에서 출발한다. 우선 일본은 학문, 기술, 기예 등 조선의 뛰어난 문화를 수입함과 동시에 사절을 맞이함으로써 에도 막부 정권의 권위를 세우고자 했다. 이 때문에 일본은 국비를 많이 소모하면서도 통신사를 최상급 국빈으로 대접했다.

반면, 조선은 대외적으로는 일본과의 화해 및 새 막부 축하 등의 명분을 내세웠지만 통신사를 통해 권위를 과시하는 효과를 보는 동시에 일본 측의 내부 사정을 살펴보려는 목적을 품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에 있는 포로들을 송환하는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는데, 실제 1617년 조선통신사 정사(正使)로 일본을 방문한 오윤겸은 임진왜란 때 잡혀갔던 포로 150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통신사 사행원, 또는 표류하거나 임란 중 포로가 되어 일본에 왕래한 사람들의 기행문을 모은 책 『해행총재』는 이러한 조선통신사들의 활약을 고스란히 전하고 있다. 실제 당시인들이 기록한 일본의 풍속 일부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세밀한 이 기록들을 확인해보면 극 중 국수를 먹으려는 그 순간에도 기록에 열중하는 홍주원의 행동도 이해할 수 있다.


◎원숭이 놀이 - 왜인의 소년 10인이 각기 원숭이 하나씩 끌고 뜰 아래에서 놀이를 해 보이는데, 사람의 옷을 입고 서서 칼춤을 추고 부채를 부치며 오만 가지 기교를 부리니, 그 기괴한 형용을 이루 다 적을 수 없었다.

◎축국(蹴鞠) 놀이 – 여섯 사람이 공 한 개를 가지고 전달해 가며 교대로 차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는데, 그 경쾌하고 잽싼 동작이 사람으로 하여금 발돋움하여 구경하게 하였다.

◎바둑 – 왜인의 바둑판을 보았는데, 통나무로 만들어서 바둑알을 두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 왜인들 중에서 서로 내기 바둑을 두어 파산하는 자까지 있어서, 나라의 금령이 매우 엄하므로 판을 두껍게 만들어서 바둑알 소리가 나지 않게 한다고 한다.


때로는 일본에 다녀온 뒤 서로의 기록이 엇갈리는 일도 발생하는데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2년 전인 선조 22년(1590) 일본에 통신사로 갔다 온 동인과 서인의 보고가 상반되었던 이야기가 가장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통신사 정사(正使)이자 서인이었던 황윤길은 “앞으로 반드시 전쟁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보고했던 반면에, 부사(副使)이자 동인이었던 김성일은 “전혀 전쟁의 기미가 없습니다.”라고 보고했던 것. 이를 통해 조선통신사가 풍속 뿐 아니라 정치적인 상황들을 파악하는 역할도 맡았으며, 그 견해는 개인의 의견 혹은 당파적 견해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제 <화정>의 조선통신사는 유황과 정명을 함께 싣고 조선으로 무사히 돌아왔다. 과연 이 배가 조선에 불러올 변화는 무엇일지, 그것이 실제 역사와는 어떻게 맞물리게 될 것인지 앞으로를 더욱 기대해보자.


이 기사는 국립중앙박물관, 문화재청, 한국콘텐츠진흥원, 공공누리, 공유마당에서 개방한 공공저작물의 자료를 참고하여 작성되었습니다.



iMBC연예 김은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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