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보적인 음색과 아름다운 바이올린 선율로 리스너들의 귀를 사로잡던 루시(LUCY)가 돌연 조용해졌다. 어느 때보다 밴드 열풍이 거센 요즘이지만, 한국의 3대 음악 시상식 그 어디에서도 루시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밴드 음악이 2년 연속 K팝 시장을 휩쓸고 있다. 몇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마니아들을 위한 비주류 음악으로 분류되곤 했지만, 어느새 주류로 떠올라 길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다. 음원 차트만 봐도 밴드 음악의 수요가 얼마나 증가했는지 알 수 있다. 데이식스, QWER, 잔나비, 우즈, 이승윤, 실리카겔 등 다양한 밴드들의 곡들이 차트 상위권을 수놓으며 K팝 시장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자연스럽게 한국의 3대 대중음악 시상식들 역시 밴드들을 집중 조명하고 있는 중이다. 밴드 부문에 대한 시상을 중단했다가 지난해부터 다시 시상을 시작한 '마마 어워즈'는 지난해 QWER, 올해 데이식스에 상을 건네며 높아진 인기를 실감케 했고, '멜론뮤직어워드'는 지난해 데이식스에게 '톱10'과 '밀리언스 톱10' 상을 건네며 그들의 업적을 기렸다. 올해엔 모든 밴드가 본상 수상 명단에 이름을 올리는데 실패했으나, 우즈와 한로로가 각각 '핫트렌드'와 '트랙제로 초이스상'을 수상하며 자존심 지키기에 성공했다.
'골든디스크어워즈'에서도 마찬가지. 데이식스는 올 1월 개최된 '제39회 골든디스크어워즈'에서 본상과 '베스트 밴드'상을 동시에 수상하며 K-밴드의 저력을 보여줬다. 아이돌이 점령한 K팝 시장에서도 날것의 사운드와 진심이 담긴 목소리가 통한다는 걸 보여준 격동의 2년이었다. 더 긍정적인 소식은 메이저와 함께 인디의 음악들도 함께 주목받고 있다는 점. 소란, 실리카겔, 한로로, 터치드, 브로콜리너마저, 유다빈밴드 등 비교적 방송 활동이 적은 밴드들도 인디의 벽을 허물고 대중의 플레이리스트에 진입하며 영향력을 키워가고 있다.
이처럼 밴드 시장이 하루가 멀다 하고 커져가고 있는 가운데, 유독 힘을 못 쓰고 있는 팀이 하나 있다. 2019년 '슈퍼밴드'로 결성돼 데뷔곡 '개화'부터 막강한 파급력을 보여준 루시다. 최상엽의 매혹적인 미성, 신예찬의 청량한 바이올린 선율에 힘입어 단숨에 스타덤에 오른 이들은 이후에도 '히어로' '아니 근데 진짜' '놀이' 등을 연달아 히트시키며 한국을 대표하는 밴드 중 하나로 등극하기도 했다. 지난해까지만 하더라도 밴드 부분 '대한민국 퍼스트브랜드 대상', '한터뮤직 어워즈'의 '페이버릿 밴드 퍼포먼스상' 등 걸출한 시상식에서 트로피를 들어 올리며 이름값을 증명해낸 이들이다.
하지만 유독 올해는 연말 시상식에서 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전년도 혁오·선셋 롤러코스터, 데이식스, 엔플라잉, QWER과 함께 '2024 마마 어워즈' '베스트 밴드 퍼포먼스' 부문에 올랐던 것과 달리, 올해는 노미네이트에도 실패했다. '골든디스크어워즈'와 'MMA'에선 아예 자취를 감췄다.
올해 들어 올린 트로피는 엑스디너리히어로즈와 함께 받은 'K 월드 드림 베스트 밴드 아티스트상', '코리아 그랜드 뮤직 어워즈'의 '베스트 밴드' 상 두 개뿐이다. QWER의 8개, 데이식스의 10개와는 격차가 크게 벌어졌으며, 데뷔 5년 차인 엑스디너리히어로즈한테도 6개 차이로 밀리는 모습을 보였다. 올해 '와장창'과 '선' 등 두 개의 미니앨범을 발매한 점을 고려해보면 실망스러운 기록이 아닐 수 없다. 밴드 열풍을 타고 등장한 여러 경쟁 아티스트에 밀려 힘을 못 쓰고 있다는 분석도 내놓을 수 있는데, 실제로 초동 판매량(한터차트 기준) 역시 6만4,000장(와장창)에서 5만9,000장(선)으로 소폭 감소하며 불안한 기운이 감돌게 했다.
더 우려스러운 건 현재 군 복무 중인 드럼 신광일에 이어 루시의 히트곡 대다수를 써낸 베이시스트 조원상도 곧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자리를 비울 예정이라는 점. '개화'와 '히어로', 그리고 최근 발매한 '하마'와 '사랑은 어쩌고'까지, 모두 조원상이 써낸 곡이다. 허리와 같은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던 그가 1년 6개월 동안 공백기에 돌입하는 만큼 루시의 고민도 함께 깊어질 것으로 보인다. 그야말로 루시 최대의 위기라 할 수 있다.
한편 루시는 올해 서울 송파구 올림픽홀에서 3일간의 단독 콘서트를 성공적으로 마친데 이어, 내년 5월엔 아티스트들의 꿈의 무대인 KSPO DOME(체조경기장)에 첫 입성해 팬들과 만날 예정이다. 단순 규모만 따지면 무려 5배에 가까운 인원을 채워야 한다. 과연 루시가 이번 위기를 발판으로 삼아 KSPO DOME 전석 매진에 성공, 다시 한번 한국을 대표하는 밴드로 거듭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