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TBC'미스티'의 범인은, 누구나 예상했지만 역시나 지진희가 연기하는 강태욱이었다. 제인 작가는 '뒤에부터는 복선을 너무 많이 깔아놔서 누구든 지진희를 의심할 거라 생각했는데 여러 짐작들이 난무해서 놀랐다'라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포토그래퍼로 일하다가 모델로 발탁되고, 자연스럽게 배우의 길을 가게 된 지진희는 데뷔 후 거의 반전 없는 '착한 남성'의 역할을 도맡아 해왔다. 주연을 맡기 전까지는 여느 '서브남주'들이 그러하듯 여주인공을 짝사랑하는 역할을 했음에도 그가 연기하는 서브남주들은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간계를 꾸미거나, 라이벌을 함정에 빠트리는 등의 짓은 할 줄 모르는 순한 남자들이었다. 심지어 동생이 자신의 여자를 빼앗아 가는 SBS '봄날'에서는 서로 오해로 엇갈리는 은섭(조인성)과 정은(고현정)을 위해 사랑의 오작교까지 되어주는 '세상 다시 없을 착한남자'였으니 말 다했다.
기대고 싶고, 듬직하며 신뢰가 가는 지금의 지진희 이미지를 완성시켜준 것은 MBC '대장금'의 민정호 역할이었다. 민정호라는 이름보다는 '종사관 나으리'로 기억되는 그는 이영애가 연기하는 장금이의 조력자이자, 연인으로 각종 역경에 빠지는 여주인공을 끝까지 믿어주고 도와주었다. 남자 주인공인 종사관과의 케미보다 주로 궁녀와 상궁들과의 장면이 더 잦았던 장금이인지라, 종사관 나으리의 역할은 도드라지는 캐릭터는 아니었다. 더구나 우리의 '장금이'는 위기에 빠졌을 때 백마탄 왕자님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의 재기와 능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여성이었고, 때문에 종사관 나리가 돋보일만한 장면은 더욱 많지 않았다. 중반 부터는 '종사관은 장금이가 문제를 다 해결하고 나면 출동한다'는 우스개소리까지 있었다.왜 지진희라고 욕심이 없었겠는가. 어떤 장면에서 시청자의 시선을 자신에게 붙들고 싶고, 문제의 해결사로 등장해 씬스틸러가 되고 싶은 욕심은 어느 배우에게나 있다. 그러나 지진희는 내내 이영애의 조력자로만 든든하게 복무하며 그림자 같은 연기를 했다. 여배우의 조력자 역할로만 머무르는 남자 배우, 로맨스가 주를 이루는 한국 드라마에서는 매우 희귀한 캐릭터이며 지진희는 이후에도 그런 역할들을 주저없이 맡았고 또 훌륭해 해왔다.
지진희가 나름의 연기 변신을 꾀했던 작품이 KBS2TV '결혼 못하는 남자'이다. 일본드라마 원작에서는 아베 히로시가 맡았던 '괴짜 싱글남' 역할을 성실한 이미지의 지진희가 캐스팅 됐을때, '어울리지 않는다'는 평도 있었다. 그러나 지진희는 본인이 가지고 있는 성실한 이미지에 '자기 규칙에 대한 강박'을 더해 까칠하지만,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타인 때문에 피해를 받는 것도 질색인 조재희 역할을 만들어냈다. '혼자가 좋은 이유'가 수천개는 되는 이 남자는, 결국 이웃과 주변 사람들의 영향으로 변하고 사랑에도 빠지지만 여전히 그는 '모두에게 무해한 지진희'였다.
남자 캐릭터보다는 여자 캐릭터가 도드라지는 드라마에서 지진희는 여배우를 조력하고, 그가 자신의 연기를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조용히 옆에 머무른다. '미스티'에서 그러했듯 SBS '애인 있어요'의 최진언 역시 그러한 역할이었다. 아내의 욕심으로 아이가 죽었다거나('미스티'에서는 유산이었지만), 욕망이 없이 현실에 자족하는 남편에 비해 성공욕이 큰 아내와의 마찰로 이혼을 통보하는 등의 설정이 '미스티'와 흡사한 '애인 있어요'에서 최진언은 불륜을 저지르고 이혼을 하고 4년 후 다시 아내를 찾는 남자를 연기한다. 사실 불륜을 저질렀다는 면에서나, '내가 아니라'는 독고용기를 쫓아 다닌다는 면에서 최진언은 호감을 주기 어려운 캐릭터였다. 더구나 까칠한 도해강과 귀여운 독고용기라는 1인2역을 다채롭게 소화하는 김현주가 연기의 폭을 마음껏 자랑할 수 있었던 반면, 불륜을 저지르고도 다시 돌아와 순정을 고백하는 최진언은 배우로서 그다지 시도해볼 수 있는 연기의 폭도 넓지 않은 역할이었다. 이러한 난관에도 불구하고 지진희가 그려낸 최진언은 기존의 지진희의 연기의 연장선에서 충분히 매력적이고 공감갈 요소가 많은 순애보의 남자 주인공이었다. 20대 배우의 풋풋한 로맨스와는 또 다른 절절하고 애틋한 40대의 로맨스로 '애인 있어요'는 매니아층을 형성했고, 최진언의 후회가 뒤섞인 사랑 역시 시청자들에게 공감을 샀다. 미움 받을 이유가 충분한 남성 캐릭터조차도 결국은 여성 시청자들에게 설득해내는 재주가, 지진희에게는 있다.
포스터에는 김남주와 지진희가 함께 등장하지만, '미스티'는 온전히 고혜란, 그러니 김남주의 드라마였다. 주체적이고 유능하며 자기 주장이 확실한 이 여성 캐릭터를 시청자들은 사랑했다. 오랜만에 등장한 '멋진 언니' 역할이 그토록 빛날 수 있었던 것은, 전 회에 걸쳐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는 장면을 김남주에게 기꺼이 양보하고 자신은 그늘 한편에서 무채색의 연기를 하고 있었던 지진희 덕분은 아닐까. 여배우를 조력하는 남배우, 지진희는 그게 배우로서 자존심 상할 일도 아니란 것을 알고 있다. 또한, 모든 작품에서 자신이 언제나 더 빛나야만 한다는 강박도 없어 보인다. 지진희와 비슷한 포지션에서 여자 주인공을 조력하던 남자 배우가 고 김주혁이었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무해하면서도 순정적이고 또 여자 주인공의 의사를 충분히 배려하고 받아들이는 그런 남자 캐릭터들이 더 많이 필요할 지도 모른다. 굳이 자아분열적인 집착증이나 순애보를 가장한 폭력성이 없더라도 충분히 여자 주인공을 인정하고 동등한 입장에서 배려해줄 수 있는 그런 남자 주인공들 말이다. 지금의 2030 여성 시청자들은 그런 남자 캐릭터에 환호한다. 또한, 그런 역할들을 너무도 잘 소화했던 배우가 바로 지진희다. 그렇게 무해하고 매력적인 남자 주인공의 대명사로써, 지진희의 전성기는 40대 이후에도 계속 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