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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정실록] 굴욕의 역사 '병자호란', 실록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을까

MBC 창사 54주년 특별기획드라마 <화정>과 함께 하는 조선시대 역사 읽기. 열여섯 번째로 병자호란에 대해 살펴봅니다.



저들은 조선인입니다! 지난 정묘호란 때 후금으로 잡혀간 죄없는 포로들입니다.
저들은 지금 살기 위해 고국으로 도망쳐 온 것이란 말입니다!


내가 그걸 모르는가. 허나 우리가 후금에 항복하면서 맺은 조약은 어쩔 것인가.
저들은 몸값을 지불하지 않으면 단 한 사람도 조선으로 돌아올 수 없네.
저들을 받아주었다간 후금이 다시 그걸 빌미로 삼을 테니까 말이야.


연이은 반정과 내란으로 혼란스러웠던 조정은 후금의 침략에 제대로 된 방어를 하지 못했고 결국 1627년, 후금이 조선에서 철수하며 다시는 압록강을 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양국은 형제의 맹약을 맺었다. 이는 조선에게 당장의 큰 위협인 후금과 화친하되 명나라와 적대하지 않는다는 명분을 확보한 조약이었고, 후금에게는 조선에 충분히 세력을 과시함과 동시에 더 이상의 군사적 피해 없이 전쟁을 마무리 지을 수 있는 기회였다.


"조선 국왕은 지금 정묘년 모월 모일에 금국(金國)과 더불어 맹약을 한다. 우리 두 나라가 이미 화친을 결정하였으니 이후로는 서로 맹약을 준수하여 각각 자기 나라를 지키도록 하고 잗단 일로 다투거나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요구하지 않기로 한다.

만약 우리 나라가 금국을 적대시하여 화친을 위배하고 군사를 일으켜 침범한다면 하늘이 재앙을 내릴 것이며, 만약 금국이 불량한 마음을 품고서 화친을 위배하고 군사를 일으켜 침범한다면 역시 하늘이 앙화를 내릴 것이니, 두 나라 군신은 각각 신의를 지켜 함께 태평을 누리도록 할 것이다. 천지 산천의 신명은 이 맹약을 살펴 들으소서."

-『인조실록』 1627년(인조 5) 3월 3일


하지만 동시에 이는 조선과 후금 모두에게 불만족스러운 끝맺음이기도 했다. 조선은 후금과의 형제 관계를 굴욕으로 인식하였고, 막대한 물자를 후금에 조달하게 되어 경제적 부담을 지게 되었다. 또한 점차 세력을 확장해나가고 있던 후금 역시 여전히 명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조선에 불안감을 느꼈다.


전하 이는 아니될 말이옵니다.
차라리 모두가 목숨을 내놓을 지언정 오랑캐 발 아래 그런 치욕을 겪을 수는 없사옵니다.


송구하나 목숨을 그렇게 쉽게 버린다 하지 마십시오.
대감만의 것이 아니라 이 나라 만 백성의 목숨이 달린 일입니다


결국 1632년, 지속적으로 압록강을 건너 약탈을 자행하던 후금은 정묘호란의 맹약을 파기하고 조선에 사신을 보내 '형제관계'를 '군신관계'로 개정할 것을 요구했다. 이를 두고 조선에서는 후금과 화의하자는 주화론(主和論)과 대적하자는 주전론(主戰論)이 대립하게 되었고, 주전론에 가까웠던 인조는 1633년 1월 백성들에게 전쟁에 대비할 것과 참전할 것을 촉구하는 교서를 내린다. 이로써 후금 또한 본격적으로 전쟁 준비에 돌입했고 양국을 둘러싼 전쟁 분위기는 점차 고조되었다.


"국가가 불행하여 강한 오랑캐와 가까운 이웃을 삼았다. 그들은 오로지 속임수와 폭력을 능사로 삼아 천지 순역(天地順逆)의 자연 도리를 아랑곳하지 않고 있어서 인도(人道)로 책망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즉위한 이래 일찍이 한 차례 사개(使介)도 왕래시키지 않았다.

그러자 정묘년 봄에 그들 적이 군사를 일으켜 우리 나라 변방에 기습하였다. 뜻밖에 발생한 일이어서 열진(列鎭)이 와해되어 1순 내에 갑자기 문정까지 박도하였다. 이에 나는 종사와 생령의 대계를 생각하고 잠시 관계를 맺기로 허용하여 화를 늦추는 소지로 삼았다.

그런데 지금 노적(虜賊)이 이리처럼 한없는 욕심을 품고 온갖 방법으로 구색하다 우리가 보낸 폐물을 되돌려 보내면서 우리에게 폐물을 더 내라고 협박하였다. 심지어는 글을 보내 업신여기고 방자하여 무례하기 그지없었다. 그 첫째는 중국의 사신처럼 대접해 달라는 것이며, 둘째는 배를 빌려 주고 군사를 지원해 달라는 것이었으니, 이는 신자로서 차마 들을 수 없는 일이다. 이는 대의에 관계되어 다른 일은 돌아볼 겨를이 없는 것이기에 사람을 보내 절교를 고하고 맹약을 어긴 데 대해 힐책하였다. 그러나 짐승같은 마음이라 끝내 의리로 회유할 수 없으니 변방의 싸움이 이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불쌍한 우리 백성들은 여러 차례의 변란을 겪고 수재와 한재에 기근까지 겹쳤으니 1년 간이라도 휴식한 적이 있었는가. 말이 여기에 이르고 보니 매우 마음이 아프다. 그러나 조종이 백성을 기른 은택이 살과 뼈에 배어서 수족이 머리를 보호하는 듯한 그 정성이 본성에서 우러나고 있다. 진실로 각각 충의를 가다듬어 상하가 함께 원수에 대항한다면 천리의 강토로 남을 두려워할 것이 있겠는가. 이 뜻을 잘 알아 두었다가 후일의 하명을 기다리라."

-『인조실록』 1633년(인조 11) 1월 29일



1636년 12월 9일, 압록강을 건넌 청의 10만 대군은 거침없이 말을 몰아 남하하였다. 국호를 후금에서 청으로 바꾼 뒤 황제로 즉위한 홍타이지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했던 것. 청군은 6일 만에 황주에 도착하였고, 조정은 이때서야 청군의 침략 소식을 듣고 14일에 세자빈과 원손,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을 강화도로 피난시킨다. 그러나 바로 강화도로 가는 길을 차단 당한 인조는 최명길이 적진에서 시간을 버는 사이 남한산성으로 피하였다.

남한산성 행궁 ©경기문화재단



가자. 삼전도로.
임금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은 이것이 아니더냐.


고립된 성 남한산성에 갇혀 있던 인조는 결국 1월 22일, 강화도가 함락되고 원손과 왕자들을 비롯한 200여명이 포로로 잡히자 어쩔 수 없이 항복을 결정하게 된다.


용골대와 마부대가 성 밖에 와서 상의 출성을 재촉하였다. 상이 남염의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의장은 모두 제거한 채 시종 50여 명을 거느리고 서문을 통해 성을 나갔는데, 왕세자가 따랐다. 백관으로 뒤쳐진 자는 서문 안에 서서 가슴을 치고 뛰면서 통곡하였다. (중략) 상이 걸어서 진 앞에 이르고, 용골대 등이 상을 진문 동쪽에 머물게 하였다.

용골대가 들어가 보고하고 나와 한의 말을 전하기를,
"지난날의 일을 말하려 하면 길다. 이제 용단을 내려 왔으니 매우 다행스럽고 기쁘다."
하자, 상이 대답하기를,
"천은이 망극합니다."
하였다.

용골대 등이 인도하여 들어가 단 아래에 북쪽을 향해 자리를 마련하고 상에게 자리로 나가기를 청하였는데, 청나라 사람을 시켜 여창하게 하였다. 상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였다. (중략)

사로잡힌 자녀들이 바라보고 울부짖으며 모두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
하였는데, 길을 끼고 울며 부르짖는 자가 만 명을 헤아렸다.

-『인조실록』 1637년(인조 15) 1월 30일



1637년 1월 30일 삼전도의 굴욕은 인조에게뿐만 아니라 조선 역사에서 가장 굴욕적인 순간으로 꼽힌다. 병자호란 패배 후, 심전도에서 인조는 청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군신의 예를 갖추었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포로들과 함께 청으로 끌려가 9년 간의 타지생활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서울 삼전도비 ©문화재청
병자호란이 끝난 뒤 청태종은 자신의 공덕을 새긴 기념비를 세우도록 조선에 강요했고 그 결과 삼전도비가 세워졌다. 비문은 이경석이 짓고 글씨는 오준이 썼으며, '대청황제공덕비'라는 제목은 여이징이 썼다.




그치만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요. 내가 무슨 일을 당했다면 차라리 혀 깨물고...

뭔 일이 있었으면 어때. 임자가 돌아왔으면 된 거야. 그걸로 다 된 거야.


병자호란의 아픔은 비단 왕실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빈번한 약탈에 생계를 이어가기가 곤란했던 국경 일대의 사람들, 또 크고 작은 전쟁에 직접 동원되어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당했던 사람들까지 나라 전체에 피해자가 속출했다.

뿐만 아니라 호란 때마다 수십만 명의 조선인들이 청에 인질로 끌려 갔는데 이들은 노예시장에 팔리거나 비싼 값을 치른 뒤에야 조선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때, 부유한 집에서는 대가를 치르고 가족을 데려왔지만 대부분의 포로들은 가난한 사람들이어서 이들의 속환이 국가적 문제로 대두되었으며, 특히 여성들은 돌아온 후에도 환향녀(還鄕女)로 불리며 순결을 지키지 못했음을 비난 받아 이혼을 당하거나 자살을 하기도 했다.


신풍 부원군 장유가 예조에 단자를 올리기를 “외아들 장선징이 있는데 강도의 변에 그의 처가 잡혀 갔다가 속환되어 와 지금은 친정 부모집에 가 있다. 그대로 배필로 삼아 함께 선조의 제사를 받들 수 없으니, 이혼하고 새로 장가들도록 허락해 달라.”고 하였다.

전 승지 한이겸은, 자기 딸이 사로잡혀 갔다가 속환되었는데 사위가 다시 장가를 들려고 한다는 이유로 그의 노복으로 하여금 격쟁하여 원통함을 호소하게 하였다. 형조에서 예관으로 하여금 처치하게 하기를 청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사로잡혀 갔다가 돌아온 사족의 부녀자가 한둘이 아니니, 조정에서 반드시 십분 참작하여 명백하게 결정한 뒤에야 피차 난처한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사람이 부부가 된다는 것은 중대한 데 관계되는 일이니, 대신에게 의논하소서."하였다.

좌의정 최명길이 헌의하기를, "(중략)신이 전에 심양에 갔을 때 출신 사족으로서 속환하기 위해 따라간 사람들이 매우 많았는데, 남편과 아내가 서로 만나자 부둥켜 안고 통곡하기를 마치 저승에 있는 사람을 만난듯이 하여, 길 가다 보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부모나 남편으로 돈이 부족해 속환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장차 차례로 가서 속환할 것입니다. 만약 이혼해도 된다는 명이 있게 되면 반드시 속환을 원하는 사람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허다한 부녀자들을 영원히 이역의 귀신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중략) 비록 정결한 지조가 있더라도 누가 다시 알아주겠습니까. 이로써 미루어 본다면 전쟁의 급박한 상황 속에서 몸을 더렵혔다는 누명을 뒤집어 쓰고서도 밝히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사로잡혀 간 부녀들을 모두 몸을 더럽혔다고 논할 수 없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한이겸이 상언하여 진달한 것도 또한 어찌 특별히 원통한 정상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그러나 이 뒤로는 사대부집 자제는 모두 다시 장가를 들고, 다시 합하는 자가 없었다.

사신은 논한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으니, 이는 절의가 국가에 관계되고 우주의 동량이 되기 때문이다. 사로잡혀 갔던 부녀들은, 비록 그녀들의 본심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변을 만나 죽지 않았으니, 절의를 잃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미 절개를 잃었으면 남편의 집과는 의리가 이미 끊어진 것이니, 억지로 다시 합하게 해서 사대부의 가풍을 더럽힐 수는 절대로 없는 것이다.

(중략) 선대의 현인이 말하기를 "절의를 잃은 사람과 짝이 되면 이는 자신도 절의를 잃는 것이다." 하였다. 절의를 잃은 부인을 다시 취해 부모를 섬기고 종사를 받들며 자손을 낳고 가세를 잇는다면,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 아, 백년 동안 내려온 나라의 풍속을 무너뜨리고, 삼한을 들어 오랑캐로 만든 자는 명길이다. 통분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

-『인조실록』 1638년(인조 16) 3월 11일


대내외적으로 큰 상처를 남긴 병자호란이 이후 조선은 명과의 관계를 끊고 완전히 청에 복속되었으며 이 관계는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기사는 한국콘텐츠진흥원, 국사편찬위원회, 한국학중앙연구원, 문화재청 등에서 개방한 공공저작물을 참고하여 작성되었습니다.



iMBC연예 김은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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