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창사 54주년 특별기획드라마 <화정>과 함께 하는 조선시대 역사 읽기. 열네 번째로 소용 조씨의 삶에 대해 알아봅니다.
제가 마음 먹어 넘기지 못한 사내가 어디 있었습니까.
역사에는 이름조차 남지 않았지만 결국 종1품 귀인에 오르며 파란만장한 생활을 했던 '조씨'. 우리에게는 '소용 조씨'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이 여인은 인조의 총애를 듬뿍 받으며 승승장구했고, 인조의 시대가 막을 내리는 것과 동시에 비극적 최후를 맞이했다. 최근 <화정> 속에서는 '여정'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해 악녀 본색을 가감없이 드러내며 주목 받고 있는 그녀의 실제 삶은 어떻게 기록되어 있을까.
1630년(인조 8) 여시(女侍, 궁중에서 임금, 왕비, 왕세자를 가까이 모시어 시중들던 여자)로 입궁한 조씨는 1637년 종4품 숙원(淑媛), 1638년 정4품 소원(昭媛), 1640년 정3품 소용(昭容)이 되었다. 인조의 총애를 등에 업고 권세를 장악한 소용 조씨는 틈만 나면 임금에게 모함을 일삼았고, 궐에는 그녀의 눈 밖에 날까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1635년 인조의 정비였던 인열왕후가 사망하고, 1638년 장렬왕후가 계비로 책봉되자 소용 조씨가 그 사이를 이간질시켜 결국 별거하게 만들었다거나 소현세자빈 강씨와의 불화가 심각하여 밤낮으로 인조에게 세자 내외의 죄악을 읊으며 모함했다는 등 그녀의 투기와 모략에 대한 많은 일화들이 전해진다. 결국 1645년 청나라에서 돌아온 소현세자는 두 달 만에 죽음을 맞이했으며, 독살의 흔적이 뚜렷했음에도 장례가 서둘러 진행돼 많은 의문점을 남겼다. 당시 소현세자의 담당 의관 이형익은 조씨의 어머니 집에 드나들던 자로 인조의 신임을 받고 있었으며 소현세자의 죽음 이후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아 의심을 더한다.
그런데 상의 행희(幸姬) 조 소용(趙昭容)은 전일부터 세자 및 세자빈과 본디 서로 좋지 않았던 터라, 밤낮으로 상의 앞에서 참소하여 세자 내외에게 죄악을 얽어 만들어서, 저주를 했다느니 대역무도의 행위를 했다느니 하는 말로 빈궁을 모함하였다. 세자는 본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병을 얻었고 병이 난 지 수일 만에 죽었는데, 온 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鮮血)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幎目)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 빛을 분변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藥物)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 그런데 이 사실을 외인(外人)들은 아는 자가 없었고, 상도 알지 못하였다. -『인조실록』 1645년(인조 23) 6월 27일 |
소현세자 사망 이후에도 그 일가의 시련은 계속됐다. 우선 법도대로 그의 아들인 석철이 아니라 인조의 아들 봉림대군이 세자로 책봉됐으며 이듬해 소현세자빈 강씨 역시 모함을 받아 폐서인 된 후 사약을 받았고, 세 아들들은 제주도로 유배된 것. 반면, 소용 조씨는 정2품 소의(昭儀)에 올랐고, 소의 조씨 소생의 왕자 이징은 숭선군이 되었으며, 1647년 효명옹주에 봉해진 조씨의 장녀는 당시의 권세가였던 영의정 김자점의 손자 김세룡과 혼인하며 실세임을 입증했다.
숙원(淑媛) 조씨(趙氏)를 소의(昭儀)로 삼았다. 세자 책봉 후에 으레 있는 은전이다. 이때 중전 및 장 숙의(張淑儀)가 모두 사랑을 받지 못하고 소의만이 더더욱 총애를 받았으며, 또 성품이 엉큼하고 교사스러워서 뜻에 거슬리는 자를 모함하기가 일쑤이므로, 궁중에서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 중에서도 소현 세자빈 강씨(姜氏)가 가장 미움을 받아 참소와 이간질이 날이 갈수록 더 심하였는데, 강문성(姜文星)이 귀양가게 되자 사람들이 모두 강씨에게 화가 미칠 날이 멀지 않았음을 알았다. -『인조실록』 1645년(인조 23) 10월 2일 |
| 공주오룡리귀부(公州五龍里龜趺) ©문화재청 귀부는 비받침부분을 일컫는 말로, 대개 거북 모양을 띠고 있다. 이 귀부는 조선 제 16대 임금인 인조의 아들 숭선군의 신도비(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무덤 가까이에 세우는 비)를 세우기 위해 만든 것이나 비를 세우지 못하고 중단되어 귀부만 남은 것이다. 숭선군은 이름은 징(徵)이고, 인조의 다섯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귀인 조씨(趙氏)이다. 효종 2년(1651) 누이인 효명옹주의 시할아버지 김자점의 역모에 관계되었다 하여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효종 7년(1656)에 석방되어 벼슬과 지위를 되돌려 받았다. |
1649년 소의 조씨는 마침내 종1품 귀인(貴人)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그 해 인조가 죽고 효종이 즉위하자 김자점과 함께 주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결국 1651년(효종 2) 귀인 조씨가 장렬왕후와 효종을 저주했다는 죄목이 드러나며 자결하라는 명을 받고 사사되었다. 당시의 자백들에는 귀인 조씨가 옛 무덤에서 썩은 관 조각을 구하고 불상을 주조했으며, 부정한 내용으로 기도를 일삼고 사람의 뼛가루를 비롯한 더럽고 흉한 물건들을 궁궐 주변의 땅에 묻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저주를 행했음이 드러나 있다.
"우리들이 옛 무덤에서 썩은 관의 조각을 구하여 조 귀인에게 바쳤습니다. 그리고 불상(佛像)을 주조하고 부도(不道)한 내용으로 기도한 등의 일에 대해서도 모두 참여하여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귀인이 작은 궤짝에다 사람의 뼈가루를 담아서 우리를 시켜 옹주에게 전해주게 하여 저주하는 데 쓰게 하였습니다." -『효종실록』1651년(효종 2) 11월 23일 "역적 조씨가 저주한 변고는 극히 흉악하고도 참혹하다. 그 딸과 함께 역모를 꾸며 흉측한 뜻을 부렸다. 이에 안으로는 궁액의 은밀한 곳과 밖으로는 대군(大君)과 부마(駙馬)의 집에 아침 저녁으로 출입하면서, 세수하고 머리 빗을 때 쓰는 도구라고 칭하고서 몰래 흉하고 더러운 물건을 감추었으며, 옷소매 속에 넣어 스스로 가지고 다니기도 하였다. 심지어는 흰 이가 있는 두골(頭骨)과 누린내나는 뼛가루를 밀봉하여 몰래 가지고 가서는, 자전과 대전에 흩뿌리게도 하고 파묻게도 하였다는 설이 요사스런 무당인 앵무(鸚鵡)의 공초에서 나왔다. (중략) 이는 임금을 무시하고 나라를 무시한 계책으로, 끝내는 반드시 왕가(王家)의 지친을 모두 해친 다음에야 그만두었을 것이다." -『효종실록』1651년(효종 2) 12월 14일 |
결국 역모에 휘말려 죽음을 맞이했지만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 입궐해 인조가 살아있는 동안 내내 그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품계를 점점 높여갔던 조씨의 삶은 신분과 성별의 한계가 뚜렷했던 당시 조선에서는 상당히 파격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요즘으로 따지면 인조를 빠져들게 한 치명적 매력의 소유자 '팜므파탈'인 동시에 전형적인 '신데렐라' 스토리의 주인공이었던 것. 최근 드라마에서는 주로 악녀로 표현되지만 나름대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 여인의 저력을 과연 <화정>이 어떠한 방식으로 설득력 있게 그려낼 것인지, 앞으로 더욱더 날개를 달게 될 조씨의 활약을 기대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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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BC연예 김은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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