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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길촌PD 인터뷰] 30년 전 CG 없는 '명량' 어떻게 탄생했을까?

iMBC 연예뉴스홈페이지 2014-08-21 11:32
[유길촌PD 인터뷰] 30년 전 CG 없는 '명량' 어떻게 탄생했을까?

그야말로 '이순신' 열풍이다.

영화 '명량'이 19일 오후 관객 1500만을 돌파했다. 대한민국 국민의 1/3이 관람했고, 국내 영화로는 역대 최단ㆍ최고 스코어를 모두 갈아치운 기록이다. 개봉한지 20일이 넘은 지금까지 꾸준히 실시간 예매율 1위를 차지하고 있는 걸 보면 머지 않아 2000만 관객을 모으는 일도 불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대한민국 역사상 이토록 뜨거운 사랑과 존경을 한결같이 받은 인물이 또 있을까?

이순신의 생애와 기적같은 승전 스토리는 수년간 연극, 영화, 드라마, 소설 등 각계의 소재로 끊임없이 활용될만큼 매력적이다. 그리고 시대를 대표하는 국민 배우와 감독들에 의해 수없이 재해석되어 그 다양한 모습이 우리 앞에 펼쳐져 있다. 그렇게 이순신은 2014년, 지금 우리 앞에 여전히 살아숨쉬며 그 '불멸성'을 입증하고 있다.


이처럼 모두가 사랑하는 인물, 수없이 다시 그려진 인물, 대중들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얻고 있는 인물의 이야기를 그려야 한다면 당신은 과연 그를 어떻게 새롭게 표현할 수 있을까? 게다가 지금처럼 인터넷도 없고, CG기술도 없는 시대라면?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영화 '명량'보다 앞서 이순신의 이야기를 그린 감독이 있다. 1986년 MBC <조선왕조 500년> 시리즈 중 '임진왜란편'을 통해 이순신의 일대기를 그린 유길촌PD.

그는 구국 영웅 이순신의 모습에서 무엇을 보고 또 어떻게 표현하려했을까? 또 지금과 같이 충분치 않은 고증자료와 CG기술조차 없는 상황에서 '명량해전'의 스펙터클함은 과연 어떻게 탄생되었을까? 이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1986년 당시 MBC <조선왕조 500년-임진왜란>의 연출을 맡았던 유길촌PD와의 인터뷰를 통해 그 시절 이순신과 '명량'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았다.


Q. 영화 '명량'을 어떻게 보셨는지 궁금합니다.

저도 영화 ‘명량’을 보았는데요, 우리 나라의 사회현상, 정치적인 현실, 국제관계 이런 것들이 ‘명량’이라는 영화를 통해서 관객들이 보고싶어하는 소망의 대상이 된 게 아닌가. 그리고 그런 때에 이 영화가 시의적절하게 개봉된 것이 아니었는가. 그래서 영화를 기획하고 제작하는 사람들이 타이밍이 아주 잘 맞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Q. MBC에도 ‘명량해전’을 다룬 드라마가 있다고 하던데요?

<조선왕조 500년>은 1980년대 초부터 1990년 말까지 거의 10여년간 텔레비전 드라마로 제작된 시리즈였습니다. 여기에는 총 11편의 이야기가 전개됐는데요, 그 중에 ‘임진왜란’이 5화, 다섯 번째 작품이에요.

물론 작가는 신봉승 선생이라는 한 분에 의해서 그게 11화가 다 계속됐습니다. 다른 작가가 없었어요, 연출은 더러 바뀌었지만요. 예를 들어, 저같은 사람도 기획을 하다가 끼어들게 됐고, 돌아가신 김종학 씨도 연출을 한 적이 있고, ‘남한산성’ 같은 작품은 그분이 했어요. 그런 식으로 연출자의 변화는 있었어요.

임진왜란은 상당한 기간 동안 여러 가지 해전, 육상 전투 이런 것들이 다양하게 펼쳐져 있거든요. 그렇지만 제가 만든 임진왜란의 경우에는 전쟁 위주의 사극이라기 보다는 정사에 바탕을 둔 것이었어요. 그래서 그 당시에 한일관계는 어떠했는가, 또 예를 들어서 중국관계는 어떠했는가, 또 국내 사정은 어떤가 이런 것들이 그려졌죠. 그 당시에는 당파 싸움이 굉장히 격심했을 때니까요. 그런 것들을 총체적으로 다룬 드라마였어요.



Q. CG기술 같은게 없었을 텐데, ‘전투 장면’은 어떻게 촬영됐나요?

그 때 당시에 해전 장면이나 이런 전쟁 장면들이 굉장히 스펙터클하게 전개되어야 하니까 한 사람의 감독으로써는 이 방대한걸 소화하기가 어려웠죠. 그래서 원래는 이병훈 씨가 <조선왕조 500년>의 연출을 대부분 했는데, 그때 <풍란>을 막 시작하면서 나한테 연출을 물려주고 일본으로 출장을 갔어요. 배에 대한 제작방법이라던가 일본의 미니어처 촬영에 대한 기술이라던가 이런 것들을 공부하기 위해서요. 그러니까 자리가 비게 돼서 <풍란>에서부터 제가 연출을 하게 됐지요.

이병훈 PD가 조사해가지고 와서 의정부 문화동산에다 한국 최초로 미니어처 촬영을 위한 풀을 만들었어요. 그래서 땅을 파고 하니까 시간이 꽤 많이 걸렸죠. 그리고 일본에 있는 특수 기술자들을 초청해가지고 특히 카메라맨이라든가 호리존트(바닥부터 천장까지 이음새 없이 만들어 놓은 세트 벽면) 뒤에 벽면을 칠하는 거라든가 이런 것들을 처음에는 일본 기술자가 와서 했어요. 그 당시에 그게 얼마나 자연스러웠는지 하늘을 날던 까마귀나 참새 때 같은 것들이 부딪혀 죽기도 하고요 상처를 받아가지고요. 그러면서 거기서 촬영을 했고, 처음에 시작할 때만 일본 기술자들의 도움을 받았고, 그 다음에는 우리 기술로 다 했습니다.


미니어처는 거기서 촬영을 했고, 실제 해전장면이 있잖아요. 그러면 배가 있어야 해요 그건 강진 앞바다에다 세트장을 만들어 놓고 그쪽에서 촬영을 하고, 육상 장면 같은 건 문경세제 쪽에 가서 촬영을 하고 그 다음에 비원하고 민속촌하고… 굉장히 방대했습니다. 이걸 한 사람이 다 한다는 게 힘들어가지고, 업무를 나눠가지고 총괄적인 연출은 제가하고 비원과 민속촌은 제가 찍고 문경과 멀리가야 하는 곳은 이병훈 감독이 찍고. 그래서 종합해가지고 완성품을 만드는 이런 단계로 대게 했죠.


Q. 당시 이순신 역이었던 ‘故 김무생’ 씨는 어떻게 캐스팅 하셨나요?

원래 김무생 씨가 굉장히 코믹한 연기도 잘했지만 좀 냉정한 느낌이 있는 배웁니다. 그 배우의 그런 장점을 최대한 살리려는 방향의 연출을 했죠. 그리고 대게 작품 속에 작가가 그려주는 것하고 배우의 이런 면이 어느 정도 매치가 잘 되기 때문에 작가도 김무생이라는 배우를 이순신이라는 배역으로 대입해놓고 생각을 하거든요.

당시에는 일본 배역들이 인기를 많이 끌었어요. 정진, 지금도 배우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분이 거의 초창기입니다. 다른 드라마에서 잘 안 보던 사람이었거든요.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 역을 했는데 아주 잘 했어요. 그리고 또 그 사람의 후처가 있었는데, 그 후처 역을 이혜숙이라는 그 당시 신인 배우가 해서 그런 배우들이 인상적이었고요. 일본의 장군들은 정승현 씨라고 성우생활을 오래했고 연기도 많이 했던 분이 있는데 그분이 한국을 침략했던 세 명의 일본 장군 중 하나로 나오거든요. 정승현 씨가 그때 명연을 했어요.



Q. 1986년도면 인터넷도 없었을 텐데, 자료수집은 어떻게 이루어졌나요?

우리가 프로그램을 하면 대게 역사학계에 있는 젊은 교수 분들하고 프로그램을 기획하기 시작할 때부터, 그러니까 길게는 일 년 전부터 아니면 한 2-3개월 전부터 늘상 자주 만나요. 그분들하고 술도 같이 먹고 밥도 같이 먹고 대화를 하면서 많은 얘기들을 수집해가지고 그것들을 모아놓은 것들이에요. 특히 젊은 사학자들은 육칠십 넘은 사학자들하고 조금 다르거든요. 의식도 다르고.

그래서 잘 얘기를 안 하는데, 그걸 잘 빼내는 게 피디의 역량이죠. 그래서 아주 안 할 얘기인데 술 한잔 먹은 김에 얼떨결에 얘기한 게 약점을 잡힌거죠. 그러면 파고들어야죠. 파고들면 어떤 본심의 얘기들이 살짝살짝 나오게 돼죠. 특히 신봉승 선생이 원고를 빨리 쓰기로 정평이 나있는 분이에요. 다른 작가들처럼 녹화날 원고가 나온다든가 이런 게 아니고 이분은 반드시 이틀 전에는 원고가 나오니까요. 상당히 여유 있게 준비할 수 있었죠. 그런 점에서 작가를 잘 만났고요.

영화는 (개봉) 시간이 미뤄지면 더 화면을 만들 수 있거든요. 또 준비가 안 되면 안 하면 되는 거예요. 방송은 그게 안 되죠. 이미 편성된 시간에 날짜에 모든 게 배우들의 스케줄까지 짜여져 있는데 거기에 맞춰서 촬영을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애로사항이 그런 점에서 영화보다는 많죠.


Q. 좋은 연출을 하려는 후배들에게 해주실 조언이 있다면?

최근에 KBS에서 한 <정도전>도 봤어요. 근데 시각 자체가 좀 달라요. 그 동안에 우리가 알고 있던 ‘정도전’이라는 인물에서 많이 달랐고, 또 우리는 위화도 회군이니 이성계니 이런 쪽만 잘 알았지, 사실은 정도전과 정몽주 이런 충신들의 얘기들이 어떻게 얼크러져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거든요. 단순히 위화도 회군만 대단한 것으로 알고 이렇게 생각했었는데, 그런 것들을 비교적 그 작가는 자기 나름의 시각이 있었던 거죠.

그게 결국은 어떤 시각에서 보느냐 하는 게 중요해요. 왜냐하면 한 여자를 캐릭터를 보는 시각에 따라 어떤 사람은 양공주로 만들 수 있고, 어떤 사람은 백설공주로 만들 수 있는 거거든요. 그만큼 지금 이 스토리를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가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에, 그건 드라마 연출을 하는 감독들이라면 다 고민해야 할 부분들이에요. 그것 때문에 술도 먹고 그것 때문에 집에도 못 들어가고 그것 때문에 밤도 새고 그러는 거거든요. 그렇게 해서 좋은 시각 자체를 발견해냈다 하면 그 다음에는 쉬워요. 거기에 따라 가면 되는 거거든요. 그런 것을 찾아내기가 굉장히 어렵다는 거죠. 실제로 그렇게 되면 쉬울 거예요.


Q. 수많은 이순신 영화들 가운데 '명량'이 흥행에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은 뭘까요?

<조선왕조 500년>하고는 다르지만 제가 <장희빈>이라는 드라마를 연출했거든요. 처음에는 저는 한두 주 나가고 방송이 중단될 줄 알았어요. 얼마나 여론이 시끄럽고 더군다다 계엄령 하였거든요.

그때도 역시 중요한게 뭐냐면 사회현상이에요. 왜냐하면 그때 정인숙이라는 술집 여자가 피살당하는 사건이 있거든요. 이런 사건이라든가, 장영자의 사기사건 이런 것들이 종합되다 보니까 ‘옛날이나 지금이나 어쩌면 이렇게 똑같으냐’ 이래가지고 관객들에게 굉장히 많은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어요. 그때 <장희빈>이라는 드라마가 나가니까 엄청나게 인기를 끌고 심지어 민속촌 같은 데를 촬영가면 할머니들이 이혜숙이를 붙잡고(이혜숙 씨가 인현왕후를 했거든요) 눈물을 많이 흘리고 그랬어요.

그런 것들이 다 사회현상과 맞아 떨어져야 한다. 드라마를 기획할 때는 항상 우리가 생각하는게 미래는 어떨 것이며, 현재는 어떠하냐 하는 것을 잘 간파해가지고 거기에 맞아떨어지는 것을 스토리로 전개해야만이 소위 천만 관객이 되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보면 역시 영화 ‘명량’은 그런 기획을 매우 적절한 시기에 잘했다. 아니면 이게 적절한지 아닌지 몰랐는데 어쨌든 잘 맞아떨어졌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 거예요.


Q. 영화와 드라마를 사랑하는 모든 분들에게 한말씀

한국 영화를 많이 봐주세요. 저는 그렇게 부탁드리고 싶고요, ‘명량’ 뿐만 아니라 다른 한국 영화도 여러 편, 적어도 일년에 열 편 정도는 꼭 봐주시기를 바랍니다. 특히 ‘명량’에서 영화가 제시하는 ‘임금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국민에 대한 충성이다’하는 그런 것들을 되새기면서 안 좋은 부분이 많이 있었다 하더라도, 혹은 과학적으로 뭐 저럴 수 있는가 하는 영화라 할지라도 그런 면에서 감독이 요구하는 어떤 메시지 자체를 여러 분들이 예쁘게 받아들이시고 많이 봐주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iMBC 김미영 | 영상 홍아람 | 사진 김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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