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같은 자연스러움, 뭘 해도 기본 이상은 할 것만 같은 신뢰감. 잘생겼다, 섹시하다, 혹은 비호감이라는 규정된 인상이 아니라 그냥 묘하게 ‘느낌이 있는’ 남자. 우리가 잘 알지는 못하지만 우리가 봐왔던 많은 영화와 드라마에 흔적을 남긴 배우. 바로 김영재다. 5월 21일 개봉을 앞둔 영화 <바다 쪽으로, 한 뼘 더>에서 그는 역시 튀지 않게 인물 속에 스며들어 여운을 남긴다. 웬만해선 놀라지도 화내지도 않을 것 같은 평온한 표정, 듣는 이를 저절로 다소곳하게 만드는 조근조근한 말투, 욱해서 시작한 연기에 표 나지 않게 열정을 담은 배우 김영재를 만났다. 이 남자, 궁금하다. 정미래 기자 | 사진 조준우 기자
Filmography 영화 <바다 쪽으로, 한 뼘 더> <모던 보이> <밀양> <슬리핑 뷰티> <사랑니>, 드라마 <사랑해, 울지마> <달콤한 나의 도시> <마왕> <이 죽일 놈의 사랑>
<바다 쪽으로, 한 뼘 더>에 출연한 결정적 계기가 있다면?
시나리오 읽고 나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우리나라엔 이렇게 예쁘고 일상적인 성장영화가 별로 없지 않나. 일본영화에 그런 작품이 많아서 조금 부러웠는데, 이 시나리오를 보니까 그런 기운을 충분히 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극중 연상의 여인에게 반한다. 그동안 멜로 연기를 많이 보여줬는데, 이번 영화에선 어떻게 표현하고 싶었나?
처음부터 사랑에 빠지는 건 아니고 서서히 감정이 생긴다. 선재는 죽은 누나에 대한 잔상을 지닌 인물이다. 연희 또한 죽은 남편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비슷한 상처를 가진 사람들이 만나면 서로 치유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 마련이다. 얘기하고 공감하다가 그 사람에 대한 애정이 싹트게 된 거다. 좀 더 다가가고 싶고 같은 길을 걸어가고 싶은 마음.
사진작가로 나오는데, 연기를 위해 사진을 배웠나?
배우진 않았다. 솔직히 요즘 디카를 다 갖고 있어서 사진은 기본적으로 찍으니까. 실제 사진작가에게 기본적인 자세는 지도 받았다. 나보고 자세 좋다고 하더라.(웃음)
사진 찍는 걸 좋아하는 편인가?
뭘 골라서 찍지는 않고, 여행 갔을 때 주로 풍경을 찍는다. 바닷가나 한옥, 오래된 것을 좋아한다.
<바다 쪽으로, 한 뼘 더>
<바다 쪽으로, 한 뼘 더>의 선재도 그렇고 영화 <사랑니>, 드라마 <달콤한 나의 도시> 등에서 부드럽고 사려 깊은 이성친구, 꼭 한 번 사귀고 싶은 소울메이트 역할로 각인됐다.
다른 역할도 많이 했는데. 정말 나쁜 악역도 해봤었고. 일단 많이 사랑받은 작품들이 공교롭게도 비슷한 느낌이 드는 캐릭터였다. 안 그래도 어떤 분이 이런 질문을 하더라. 왜 똑같은 역만 하냐고. 하지만 난 다르다고 생각한다. 작품마다 다른 상황과 조건이 있는 거니까. 똑같은 캐릭터란 없다.
배우 김영재를 ‘착한 남자’로 보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실제 김영재는 어떤 남자인가?
드센 편은 아니다. 조용한 편인데, 그래도 술 마시면 취하고 흥에 겨울 땐 노래도 부르고 화나면 소리도 지른다.
잠깐 본 바로는 차분한 성격인 것 같긴 한데.
낯선 사람 앞에서는.(웃음) 웬만해선 놀라지도 않고 흥분도 잘 안 하는 편이긴 하다. 내가 세상에 좀 무관심해서 그런가.(웃음)
아침드라마, 일일드라마, 미니시리즈, 단편영화, 장편 상업영화 가리지 않고 출연하고 있다. 작품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자신만의 기준이란 게 있다면?
그냥 필(feel) 꽂히는 걸로. 시나리오 읽어보고 괜찮다고 생각하면 적극적으로 역할을 따내려고 노력한다. 아직까지는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원래 감독이 꿈이었는데 연기자가 된 거라고.
그때가 인생에서 제일 힘든 시기였던 것 같다. 가족 문제도 그렇고, 개인적인 삶에 있어서도. 20대 중반에 그런 고민들을 많이 하지 않나. 그냥 어떤 영화를 보다가 소름이 싹 돋으면서 연기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갑자기 든 거다. 욱해서 연기를 하게 된 셈이다. 단편영화부터 시작했고 2001년 <스물넷>으로 장편 데뷔를 했다.
<성냥팔이 소녀의 모험> <해안선> <국화꽃 향기> <와일드 카드> <싱글즈> <안녕! 유에프오> <거미숲> 등 굉장히 많은 영화에 조연으로 출연했다. 그러던 중 김영재라는 배우를 관객에게 각인시킨 건 <사랑니>부터인 것 같다. <사랑니>는 어떻게 출연하게 된 건가?
정지우 감독님과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던 건 아닌데, 내가 출연한 단편을 보시고 마음에 들어 하셔서 연락을 주셨다. 공식적으로 오디션을 본 후에 캐스팅됐다.
<사랑니>
<사랑니>의 오정우는 비록 주인공은 아니지만 굉장히 인상적인 캐릭터다. 이성친구와 편하게 동거를 하며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미묘한 감정을 유지하는 인물을 표현하기가 결코 쉽지 않았을 텐데.
정우는 나와 너무 다른 인간이었다. 당시 난 그런 직장도 여유도 없이 그냥 살기 바빴으니까. 처음엔 정우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막막하기만 했다. 패스트푸드점에서 인영(김정은), 이석(이태성)과 마주치는 장면은 재촬영까지 했을 정도로 헤맸다. 그리고 감독님과 굉장히 많은 얘기를 나눴다. 계속 촬영 중단하면서. 그전엔 이성친구와 소울메이트가 되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어느 순간 정우가 들어오더라. 아, 이성끼리도 이런 관계가 가능하구나 깨닫게 된 거다. 나도 어떻게 보면 보수적인 사람인데 <사랑니>를 통해 많이 변화됐다.
<밀양>에서 신애(전도연)의 동생 역할도 잠깐 등장한 것이었지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내가 많이 부족해서 이창동 감독님이 어떤 걸 원하시는 건지 처음엔 잘 몰랐다. 역시 이 작품에서도 촬영하면서 찾아갔다. 감독님이 원했던 건 서울 샌님이었다. 톡톡 쏘아대는 말투의 정말 얄미운 사람이어야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감독님이 “영재 너 잘 웃잖아. 그냥 웃어.” 이렇게 말씀하셨다. 결국 애초에 의도한 캐릭터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걸 뽑아내서 재창조하게 됐다. 잘 웃지만 결코 기분 좋은 웃음이 아닌 사람으로.
필모그래피가 독특하다. 주류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하면서 이렇게 단편영화를 많이 찍는 배우가 또 있을까?
난 연극영화과를 나오거나 연기를 공부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다양한 영화를 통해서 내 안에 있는 것을 끄집어내며 연기 경험을 쌓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처음 연기 시작할 땐 단편영화에서 불러주기만 하면 다 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장편영화도 하고 드라마도 하다 보니까 스케줄이 잘 안 되더라. 어느 순간 단편 쪽에서는 연락이 뜸해지고 지금은 거의 연락이 안 된다.
단편영화, 저예산 영화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것 같다.
‘단편영화로 시작해서 인정받은 배우’라는 말을 듣고 싶었다. 그런데 <똥파리> 양익준 감독이 먼저 그걸 해줘서 너무 기분이 좋다. 우린 같은 바닥에서 시작했는데 익준 군은 감독 겸 배우로서 상까지 받으니까 조금은 샘도 나면서 너무 뿌듯하다. 내가 하고 싶었던 걸 해내서. 그는 연출가로서도, 배우로서도 훌륭하다.
다시 연출해볼 생각은 없나?
생각은 있다. 그런데 극영화보다는 다큐멘터리를 찍고 싶다. 사람이 나오지 않는 영화. 아마도 ‘개미의 하루’ 이런 걸 만들지 않을까.(웃음) 내가 언제 카메라 들고 산으로 들어갈지 모른다.
<이 죽일 놈의 사랑>으로 TV 드라마에 출연하기 시작했다.
감독님이 <사랑니>를 보고 연락을 주셨다. <사랑니> 때문에 캐스팅된 경우가 많았다. 나에겐 정말 소중한 작품이다.
계속 영화만 하다가 TV로 옮겨갈 때 조금 망설여지지는 않았나?
처음에 망설이긴 했는데, 영화와 TV의 구분은 지금으로선 의미가 없는 것 같다. 시스템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배우라면 모두 소화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매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뭘 하든 잘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닐까.
김영재는 굉장한 자연스러운 배우라고 느껴진다. 연기하는 것 같지 않게 연기하는 배우라고나 할까.
그게 바로 내가 추구하는 연기관이다. 내추럴하고 리얼리즘이 느껴지는 연기. 물론 그 안에서도 색다른 모습을 보여줘야겠지. 지금 새 영화를 준비하고 있는데 지금까지와는 많이 다른 면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김영재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보통 사람의 냄새가 많이 나는 배우다. 어떻게 보면 카리스마가 부족하다고도 할 수 있는데.
처음엔 나도 그게 싫었다. 나도 좀 더 잘생기고 싶었고.(웃음) 확실한 캐릭터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 같고. 그래서 ‘나는 뭐지?’하며 우울해하기도 했다. 그런데 주변에서 감독님이나 동료들이 그게 너의 매력이라고 하더라. 악역도, 선한 인물도, 동네 오빠도 연기할 수 있는 애매모호함이 오히려 더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할 수 있으니까 좋은 거라고.
단편에선 주인공도 많이 했지만 TV 드라마나 장편영화에선 주로 조연이었다. 좀 더 나서서 극을 이끌어가고 싶은 욕심은 없나?
당연히 있다. 그런데 아직은 많이 부족한 것 같고 하다 보면 기회가 오지 않을까 싶다. 어떤 역할이든 내가 느끼고 표현하는 게 중요한 것 같다. 그리고 주인공이 되면 그에 따른 책임감을 짊어져야 하고. 어렵지 않나.(웃음)
앞으로 해보고 싶은 역할은?
밝고 재미있는 캐릭터. 코믹한 역할은 섭외가 안 들어온다. 내가 너무 진지하게 생겼나 봐.(웃음) <노팅힐>의 휴 그랜트 같은 연기를 하고 싶다. 인물 자체는 굉장히 진지하지만 주위 상황이 만들어 내는 코미디가 웃음을 주는. 로맨틱 코미디나 블랙 코미디는 꼭 해보고 싶다. 사극도 해보고 싶다. <전설의 고향>(2008)에서 잠깐 했었는데, 정통 사극 기운도 한번 받아보고 싶다. 선배님들한테 많은 걸 배울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인터뷰 기사를 보니 안소니 홉킨스 같은 배우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안소니 홉킨스 같은 배우는 어떤 배우인가?
<세상에서 가장 빠른 인디언>(The World’s Fastest Indian, 2005)이란 영화가 있다. 거기서 안소니 홉킨스의 연기를 보고 정말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그가 왜 명배우인지, 왜 거장이라 불리는지 알겠더라. 이 영화에서 그는 버트 먼로라는 실존 인물을 연기하는데, 그 인물의 동작 하나 버릇 하나까지 완벽하게 표현했다. 계산된 것이지만 너무나 자연스럽게. 뭔지는 알겠는데 내가 아직까지 흉내 낼 수 없는 영역이다. 내가 나이 들었을 때 그분처럼 정말 자연스럽게 연기할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다.
2000년부터 연기를 시작해 한 해도 쉬지 않고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중간에 쉬는 시간 되게 많다.(웃음) 마음 같아선 안 쉬고 싶다. 더 많은 작품에 참여하고 싶다. 지금이 에너지가 제일 많을 때니까. 그리고 많은 걸 느껴야 할 때니까. 당분간은 절대 쉬고 싶은 생각이 없다.
두 편의 영화가 기다리고 있다고 들었다.
<채식주의자>에 우정출연 하고, 류덕환씨와 출연하는 <링크>에선 물질적인 욕망에 휩싸여 사람들을 이용해 먹고 결국 벌 받는 인물을 연기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