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창사 54주년 특별기획드라마 <화정>과 함께 하는 조선시대 역사 읽기. 아홉 번째는 허균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런 것인지 모르고 시작했더냐.
언젠가 끝나는 이 인생과 같은 것이 권력인 것을.
권력은 언젠가 더 큰 권력에 정복당하고 마는 것을.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는 허균. 『홍길동전』은 홍길동이라는 의적을 주인공으로 하여 양반가정의 모순을 척결하고 서얼차별의 불합리에 항거한 내용의 사회소설이다. 그러나 독특하게도 정작 허균 자신은 신분의 차별을 겪어봤을 리 없는 명문가의 자제 출신이었다. 이처럼 통념에 의문을 제기하며 남다른 행보를 보인 허균, 과연 그는 <화정> 속에서 묘사된 것처럼 기행을 일삼으며 혁명을 꿈꾸었던 실패한 몽상가였을까.
| 홍길동전 ©국립중앙박물관 조선 중기 허균이 지었다고 전하는 최초의 한글소설이다. 한글소설의 효시로 중국소설 『수호전(水滸傳)』에서 영향을 받아 임진왜란 후의 사회제도의 결함, 특히 적서(嫡庶)의 신분 차이의 타파와 부패한 정치를 개혁하려는 그의 사상을 작품화한 것이다. |
반상(班常)의 도리가 엄격했던 조선 사회에서 허균은 일찍이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을 필요성을 인지한 인물이었다. 서얼 출신인 이달에게서 시를 배웠고, 이재영과는 절친한 벗으로 지내는 등 신분에 구애 받지 않았다. 이재영은 서얼 중에서도 천민의 첩에게 태어나 얼자로 구분되었는데 그가 재주를 펼치지 못하는 처지를 안타까워했던 허균의 마음은 봉급의 절반을 주어서라도 돕겠다는 내용이 담긴 아래 편지에 잘 드러나 있다.
"나는 큰 고을의 원님이 되었다네. 마침 자네가 사는 곳과 가까우니 어머니를 모시고 이곳으로 오시게. 내가 응당 봉급의 절반을 들어 그대를 대접하리니, 결코 양식을 떨어지는 경우는 없을 것이라네. 자네와 나는 서로 처지야 다르지만 취향이 같고, 자네의 재주가 나보다 열 배는 뛰어날 것이네. 그렇지만 세상에서 버림받기는 나보다도 심하니, 내가 이 점을 언제나 기가 막히게 생각하고 있다네. 나는 비록 운수가 기박해도 몇 차례 고을의 원님이 되어 자급자족할 수 있지만, 자네는 입에 풀칠하는 것조차 면하기 어렵구려. 세상의 불우한 사람은 모두 우리들의 책임일 것이라네. 나는 밥상을 대할 때마다 몹시 부끄러워 음식을 먹어도 목에 넘어가지 않으니, 빨리 오시게. 오기만 한다면 비록 이 일로 내가 비방을 받는다 해도 나는 전혀 개의치 않을 것이네." ― <여이여인與李汝仁> 1608년 1월 허균이 공주목사로 부임한 이후 이재영에게 부친 편지 |
뿐만 아니라 계축옥사 당시 거사를 일으켰던 일곱 명의 서자들 역시 허균과 각별한 사이였다. 이들이 활동한 문경새재는 『홍길동전』에 나오는 활빈당의 주요 무대이기도 하다. 이러한 연관성으로 인해 홍길동전 집필 시기를 계축옥사 전후로 추측하기도 한다.
형님은 빠지십시오. 저희 모두 형님과 알고 지낸 걸 부인할 겁니다.
저희야 힘없는 서자들이니 이런 개죽음을 피할 수 없겠죠.
허나 형님은 다르지 않습니까. 형님까지 엮을 수는 없습니다.
닥쳐라 이 자식아!
그럼 나더러 피붙이같은 너희들을 모른 척 하라는 거냐. 나 혼자 살라고?
결국 계축옥사의 관련자들은 처형되거나 유배되는데, 허균은 직접적 연관성이 드러나지 않아 목숨을 부지한다. 이후 그는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이이첨의 편에 서서 적극적으로 대북파에 가담한다. 스스로를 빗대 '불여세합(不與世合)', 즉 세상과 화합하지 못한다고 평하기도 할 만큼 우여곡절을 많이 겪었던 허균이 정권과 밀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 저를 어좌에 앉혀보시라니까요.
이씨만 왕을 해쳐먹으라는 법이 있답니까?
그러나 허균이 말년에 세상과 타협하는 법을 배우게 된 것인지, 혁명을 꿈꾸는 속내를 감추고 광해군에게 접근한 것인지 그 진의를 확인할 틈도 없이 계축옥사 5년 후 그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그 사이 허균은 광해군의 신임을 얻기도 하지만, 인목대비 등에 대한 지나친 강경론으로 중신들의 반발을 샀다.
결국 1618년, 실록에 그의 이름이 무려 185건 등장할 만큼 조정은 허균에 관한 논쟁으로 들끓었고 또 그만큼 빠르게 그의 운명이 결정지어졌다. 역모죄로 몰린 허균이 스스로 그 죄를 인정하지 않았음에도 단시간 내에 능지처참에 처해진 것. 인목대비 폐출 논쟁에서 허균과 갈등을 빚었던 기자헌조차도 그의 죽음에 대해 "예로부터 형신(刑訊, 죄인의 정강이를 때리며 캐묻던 일)도 하지 않고 결안(結案, 사형할 죄로 결정한 문서)도 받지 않은 채 단지 공초(供招, 조선 시대에 죄인이 범죄 사실을 진술하던 일)만 받고 사형으로 나간 죄인은 없었으니 훗날 반드시 이론이 있을 것이다."라고 언급할 만큼 단시간내에 예외적으로 내려진 처결이었다.
기생을 관아에 끌어들이거나 유교 사회에서 승려처럼 불경을 외는 등의 이유로 수차례 파직을 당하고, 실록에는 "사람됨이 경망하다.", "형편없다." 등 비난 일색의 기록만이 남아 있는 허균은 요즘의 시각에서도 '괴짜'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실제 그가 역성혁명을 꿈꾸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서얼이나 기생 등 당시의 비주류와도 기꺼이 벗이 되었던 열린 마음과 더 나은 세상을 꿈꾸었던 호기로운 자세만큼은 당시의 조선에서 분명한 혁명가의 모습이었던 것. 또한 조선 왕조가 끝날 때까지 재평가받지 못한 채 역적으로 남아 있어야 했던 그의 존재 자체가 조선 사회에서는 받아들여질 수 없었던 그의 사상과 행적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 기사는 공공누리, 국립중앙도서관, 문화재청, 한국고전번역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방한 공공저작물을 참고하여 작성되었습니다.
iMBC연예 김은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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