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우 김금순은 자신을 "생활형 배우"라고 정의한다. 한국에서 연극을 하다 브라질로 건너가 결혼·출산·사업을 경험했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단편영화와 작은 역할부터 경력을 쌓아왔다. 그는 "브라질에 있는 동안 언젠가 다시 연기를 해야지, 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대신 "돌아보니 연기가 늘 옆에 있었던 것 같다"고 표현한다. 연극을 하던 청춘 시절, 학원 원장으로 살던 시기, 아이들을 키우고 생계를 책임지던 시간까지 모두가 지금의 연기에 자연스럽게 쌓여 있다는 것이다.
브라질에서의 10여 년은 그의 인생을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틀어놓았다. 교회와 한인 사회를 오가며 교류하고, 학원을 운영하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동시에 이방인·며느리·엄마·사업가로 살아야 했다. 그는 "누군가에게 월급을 주는 입장이 돼 보니까 관계에서 오가는 감정이 얼마나 복잡한지 몸으로 알게 됐다"며 "그런 세세한 감정들이 다 연기의 재료가 된다"고 말했다. "결혼하고 아이도 낳아보고, 살림도 해보고, 책임져 보시면 연기에 정말 큰 도움이 됩니다."
성장 과정에서 여러 지역을 거친 경험도 지금의 연기에 깊게 배어 있다. 강원도 속초에서 태어나 전라도와 경상도를 오가며 자란 그는 "어렸을 땐 사투리 때문에 많이 놀림을 받았다"고 털어놓는다. 지역마다 말투가 달라 늘 낯선 아이처럼 서 있어야 했던 경험이 지금은 "여러 지역의 말을 편하게 쓸 수 있는 큰 자산"으로 작동한다. 경상도 사투리 연기를 자유롭게 소화하는 것도 이 시간에서 비롯됐다.
김금순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전환점으로 영화 '정순'을 꼽는다. 김금순에게 영화 ‘정순’은 단순히 첫 장편 주연작이라는 의미를 넘어선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처음으로 한 인물의 '전 생애'를 책임져야 한다는 감각을 뼛속 깊이 경험했다고 말한다. "정순이라는 인물이 살아온 시간을 내가 대신 살아야 했다. 그 사람이 어떻게 태어났고, 어떤 상처를 받고, 왜 여기까지 밀려왔는지를 끝없이 따라가야 했다." 이 작품은 한국을 넘어 여러 해외 영화제에 초청되며 새로운 경험을 안겨주기도 했다.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 자리마다 세계 곳곳의 관객들이 자신들의 현실을 떠올리며 울거나, 견디기 힘든 시간을 지나왔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김금순은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고 한다. "이건 한국만의 이야기가 아니구나. 정순이 겪는 절망과 회복의 서사가 세계 어디에서도 똑같이 존재하는구나. 그걸 배우인 내가 대신 말하고 있다는 책임감이 엄청났어요."
그는 그 순간을 "배우로서의 인생이 확 바뀐 때"라고 표현한다. 이전까지는 작품 속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데 집중했다면, '정순' 이후엔 "이 작품이 왜 나를 불렀는가" "이 인물의 이야기를 내가 관객에게 어떻게 전달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 생겼다고 했다. "정순이 없었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거예요. 그 작품은 제 연기를 완전히 다시 시작하게 만들어준 터닝포인트였죠."
이후 그는 매체에서 강렬한 존재감을 이어가며 '폭싹 속았수다', '히어로는 아닙니다만' 등 굵직한 캐릭터들을 연이어 만났다. 최근에는 영화 '야당'으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며 또 한 번 주목받았다. 시청자들이 작품 속에서 그의 얼굴을 알아보며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고 말하는 것에 대해 그는 이렇게 답했다. "제가 잘한 게 아니라 작품이 저를 선택해준 것이다. 그 역할이 가진 이야기가 관객에게 닿았다는 게 감사할 뿐이다."
감정 소모가 큰 캐릭터가 이어지는 상황에서도 그는 비교적 단단한 균형을 유지한다. 그는 "촬영이 끝나면 바로 집으로 돌아가 일상을 한다"고 말한다.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아이들한테 '양말 뒤집지 마' 하고 잔소리하고… 그 일상성이 감정을 건강하게 환기시켜준다."
그래서일까. 김금순이 연기한 캐릭터들은 극단적 상황 속에서도 현실의 질감을 잃지 않는다. 모두가 어딘가에서 '한 번쯤 마주했을 법한 사람'처럼 살아 움직인다.
강렬한 캐릭터들로 대중에게 각인된 뒤, 김금순은 예능 '편스토랑'에서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그 출연 배경에는 그의 특유의 솔직함과 실용적인 이유가 있었다. "'제니 엄마'가 너무 화제가 돼서 예능 섭외가 많이 왔어다. 그런데 '편스토랑'은 제가 원래 좋아하던 프로그램이었고, 브라질 음식으로도 재밌게 할 수 있겠다 싶었다." 특히 두 아들과 함께 출연하게 된 이유에 대해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아이들도 브라질에서 태어났고, PD님이 같이 나오면 어떻겠냐 하셔서 자연스럽게 됐다. 사실 집이 작아서 걱정했지만, 대표님이랑 화면 구성 얘기하다 보니 그냥 하게 되더라." 하지만 그 출연에는 더 깊은 의도가 있었다. "배우라고 해서 특별하지 않다. 저도 그냥 똑같이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시청자들이 "나만 알고 싶은 배우였는데 모든 게 너무 인간적으로 느껴져서 더 좋았다"고 말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캐릭터를 만날 때 가장 먼저 보는 것은 무엇일까. 김금순은 "그 사람의 전사"라고 답한다. "대본 속 인물이 50대 초반 아줌마라면, 그 사람이 어디서 태어나 어떤 환경에서 자랐고, 어떤 일을 하며 살아왔을지를 상상한다. 그 인생 전체를 같이 살아보려고 하는 편." 감독이 제시한 방향과 대본의 정보에 자신의 상상력을 채워 캐릭터의 삶을 입체적으로 세우는 방식이다.
연기 과정에서 참고 모델을 두지 않는 것도 그의 방식이다. 그는 "누군가를 따라 해야지 하고 연기해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대신 살아온 시간, 들은 이야기, 스쳐 지나간 장면들을 스스로 해석해 꺼내 쓴다. 연극 시절 1인 다역을 반복하며 무대에서 서로 다른 인물로 빠르게 전환했던 경험은 지금 다양한 작품을 오가며 캐릭터를 변주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촬영 현장에서 모니터를 잘 보지 않는 배우로도 유명하다. "감정이 한창 진행 중일 때 제 얼굴을 보면 자꾸 계산이 들어가더라. 각도를 어떻게 틀지, 시선을 어떻게 바꿀지 생각이 들어서 감정을 오래 끌고 가기가 어렵더라." 그래서 감독이나 선배가 특별히 요청할 때만 모니터 앞으로 간다. 대신 현장 흐름과 감정의 연속성을 온전히 유지하는 방식을 택한다.

나이가 듦에 따라 체력적으로 어려움을 느끼는 순간도 솔직하다. "'히어로는 아닙니다만' 찍을 때 갱년기가 와서 얼굴이 확 빨개질 때도 있었다. 겨울인데 땀이 뚝뚝 떨어지니까 분장팀이 뛰어와 닦아주고 선풍기를 틀어주고 그랬다." 그럼에도 그는 "세월을 이기는 비결은 없다"고 잘라 말한다. 대신 규칙적인 생활, 단순하고 성실한 루틴이 그를 지탱한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고, 밥 해 먹고, 산책하고, 책 읽고, 대본 보고… 겉에서 보면 지루해 보일 수 있지만 그게 저를 버티게 한다."
여러 작품을 동시에 오가고, 엄마이자 생활인으로 살아가면서도 균형을 유지하는 기준은 '감사함'이다. "일이 있어서 감사하고, 아이들을 돌볼 수 있어서 감사하고, 촬영장에서 다시 나를 불러줘서 감사하다"는 마음이 그의 에너지가 된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에게도, 후배들에게도, 그리고 해외에서 고군분투하며 살아가는 동포들에게도 같은 말을 전한다. "지금 힘들어도, 이 시간이 나중에 꿈을 이루는 데 분명히 자양분이 될 것이다."
김금순이 자신을 표현하는 문장으로 "넌 혼자가 아니야"를 골랐다. 겉으로 보기엔 누구보다 독하게 버티며 살아온 사람 같지만, 그는 인터뷰 내내 스스로를 계속 지탱해준 건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이었다고 강조했다. 연극 무대에 있을 때, 카메라 앞에서 강렬한 감정을 쏟아낼 때, 혹은 브라질에서 이방인으로 살며 생계를 책임져야 했을 때조차 그는 늘 '혼자인 것 같다'는 생각에 잠시 흔들렸다고 한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마다 누군가 조용히 옆에 서 있었다. 촬영 현장에서 감정이 무너질 때면 분장팀이 뛰어와 땀을 닦아주고, 카메라 감독이 말없이 숨을 고를 시간을 주었다. 연기 복귀 초창기엔 단편영화 스태프들이 "선배님, 우리랑 함께 가요"라며 힘을 실어주었고, 어떤 감독은 먼 길을 직접 와서 캐스팅 의사를 전하며 "당신이 아니면 안 된다"고 손을 잡아주기도 했다. 김금순은 그 순간들을 떠올리며 말했다. "우리는 늘 혼자라고 착각하는데, 사실은 주변에서 계속 누군가 밀어주고 있어요. 제가 여기까지 온 건 제 힘만이 아니에요." 그래서 이 문장은 곧 그의 연기 태도이자 인생관이다. 작품을 할 때도 '캐릭터는 혼자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주변 인물과 관계를 촘촘히 엮고, 관객에게도 '당신도 혼자가 아니다'라는 메시지가 닿기를 바란다.
그는 말했다. "제가 과거의 저에게도 같은 말을 해주고 싶어요. '넌 혼자가 아니야.' 그래서 버틸 수 있었고, 그래서 다시 연기자가 될 수 있었어요."
김금순은 내년에 OTT를 통해 여러 작품으로 시청자 앞에 설 예정이다. 새로운 캐릭터는 또 어떤 삶의 결을 담게 될까. 그는 담담히 말한다. "어떤 역할이 오든, 맛있게 요리해서 표현하는 배우이고 싶습니다." 생활과 연기가 자연스럽게 뒤섞여 한 사람의 인생을 이루는 것처럼, 그의 다음 작품 역시 김금순이라는 이름의 결을 따라 한층 더 깊어질 것이다.
iMBC연예 김경희 | 사진출처 사람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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