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날 갑자기 아파트가 물에 잠긴다. AI 개발자이자 싱글맘인 안나(김다미)와 아들 자인(권은성)은 순식간에 폭주하는 물살에 휘말리며 생존의 위기에 처한다. 물이 고층까지 차오르는 순간, 인력보안팀 희조(박해수)가 나타나 이번 사태가 단순한 지역적 침수가 아니라 인류 전체에 닥친 재앙임을 알린다. 그는 안나가 인류를 구할 마지막 희망이라며 구조를 제안하지만, 안전지대로 향하기 위해서는 자인을 두고 가야 한다는 잔혹한 조건을 내건다. 안나는 인류의 미래와 단 하나뿐인 아이 사이에서 극한의 선택을 마주한다.

▶ 비포스크리닝
김병우 감독은 강한 현장감과 절제된 연출로 주목받아온 한국 장르영화의 대표적인 감독이다. 초기작 '아나모픽'과 '리튼'에서 좁은 공간을 활용해 서스펜스를 극대화했고, 상업영화 데뷔작 '더 테러 라이브'를 통해 밀도 높은 연출력을 인정받았다. 이후 'PMC: 더 벙커'에서는 실시간 진행 방식과 군사 작전을 결합한 새로운 형식 실험을 시도했고, 최근에는 대형 프로젝트 ‘전지적 독자 시점’을 통해 세계관 확장형 작품에도 도전하고 있다.
김다미는 독보적인 분위기와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으로 빠르게 자리매김한 배우다. ‘마녀’로 데뷔와 동시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이태원 클라쓰', '그 해 우리는', '소울메이트', '나인 퍼즐', '백번의 추억'을 통해 장르를 넘나드는 안정된 연기력을 보여줬다. 특유의 생동감과 감정 밀도가 작품마다 전혀 다른 얼굴을 만들어내며 꾸준히 주목을 받아왔다.
'대홍수'는 올해 가을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작으로 공개 전부터 기대를 모았으며, 김병우 감독의 SF 재난 세계관 속에서 김다미가 어떤 엄마 캐릭터를 완성해낼지가 관전 포인트다.


▶ 애프터스크리닝
'대홍수'는 초반부 재난물의 공식을 충실히 따른다. 거대한 해일이 아파트 단지를 집어삼키고, 인물들이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장면들은 충분한 시각적 긴장감을 제공한다. 그러나 그 안의 전개는 새로움이 부족하다. 위기 속에서 아이가 엄마의 말을 듣지 않고, 엄마는 혼란 와중에도 아이를 홀로 둔 채 다른 일을 처리하는 등 재난영화에서 반복되어온 낡은 클리셰들이 여전히 등장한다. 단순한 재난극으로만 보아도 피로감이 먼저 밀려오는 순간들이다.
설정의 허술함도 눈에 띈다. 아파트 절반이 물에 잠길 정도라면 거의 절망적 상황이어야 하지만, 영화 속 인물들은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지거나, 잠시 비가 멈췄다고 빨래를 하는 등 현실성에서 멀어진 행동을 반복한다. 이러한 균열이 쌓이던 시점에 영화는 재난물에서 SF로 급회전한다.
안나가 인류를 구할 AI 개발자이며, 초반부 재난 상황과 반복되는 사건들이 사실은 'AI의 딥러닝 과정'이었다는 설정이 등장하는 순간 이야기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튼다. 지금까지 생존극에 몰입해온 관객에게는 갑작스러운 전환으로 다가오며, '그동안 본 장면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라는 혼란만 남긴다.
더 나아가 영화가 결국 ‘모성애’로 귀결된다는 점은 SF의 확장 가능성을 오히려 좁히는 선택이다. 인류의 미래와 첨단 기술을 다루면서도, 핵심 감정은 과거의 전형적 모성 드라마로 돌아간다. 인류가 사라진 뒤 인간형 AI가 인류를 대신할 것이라는 설정도 설득력이 약한데, 여기에 AI가 인간다운 감성을 갖기 위해 ‘모성애’를 배워야 한다고 제시되면 당혹감은 더욱 커진다. 감정적으로도 이성적으로도 받아들이기 어렵고, 영화의 의도가 희미해지는 지점이다.
김다미의 연기 역시 이러한 구조적 한계를 완전히 압도하지는 못한다. 모성 캐릭터가 요구하는 깊은 감정의 층위를 충분히 체화하기보다,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느낌이 먼저 와닿는다. 극중에서 인물이 인간인지조차 불분명한 설정 또한 감정 이입에 장애물로 작용한다.
결국 '대홍수'는 강렬한 초반과 탄탄한 배우진, 높은 제작비에도 불구하고 장르적 욕심과 난해한 전개가 충돌하며 완성도를 잃는다. SF 장르가 가진 사유의 깊이를 확장하지 못한 채, 낡은 감정 구조 안으로 회귀한 작품. 기술적 스케일은 미래를 향하지만 정서는 과거에 머물러 있다. 큰 야심을 품고 출발했으나, 스스로 구축한 설정에 발목을 잡힌 채 미완성에 그친 재난 SF다.
'대홍수'는 12월 19일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다.
iMBC연예 김경희 | 사진출처 넷플릭스
※ 이 콘텐츠는 저작권법에 의하여 보호를 받는바, 무단 전재 복제, 배포 및 이용(AI학습 포함)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