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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컷탐험대] '조선에선 안돼!' 아귀(餓鬼)를 달래는 의식, '수륙재'란?

기사입력2017-03-04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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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모르는 줄 아셨습니까? 내 아비가 내 어미를 죽인 것을." 아버지 성종(최무성) 임종 앞에서 그동안 마음에 품었던 독기를 드러낸 융(훗날 연산군. 김지석)이 보위를 이었다 그는 승하한 부왕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수륙재'를 지내겠다고 말하지만, 신하들의 거센 반발에 결국 무산되고 만다. 그리고 그런 그의 빈틈을 노린 공화(훗날 숙용 장씨. 이하늬)는 그를 위한 춤사위를 선보이면서 융의 마음을 훔친다. "고작 수륙재"라며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던 융이지만, 신하들 역시 일제히 사직서를 제출하며 물러서지 않았다. 그렇다면 '수륙재'가 대체 무엇이길래 왕명을 거스르면서까지 신하들이 반대했던 걸까?

▶ 이 장면 속 '오늘의 지식' :: 연산이 행하려다 거절당한 아귀(餓鬼)를 달래는 의식, '수륙재'란?


연산군이 행하려다 신하들의 거센 반발과 마주한 '수륙재'란?

중국 양나라 무제(武帝)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전해지는 수륙재는 불교에서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떠도는 외로운 혼(魂)과 아귀(餓鬼)를 달래기 위해 불법을 강설하고 음식을 베푸는 종교 의식이었다.

양나라의 무제는 불교에 대한 신앙심이 두터웠는데, 그는 떠도는 넋들을 구제해 공덕을 쌓고자 승려들과 더불어 의식을 만든다. 505년 금산사에서 재를 베푼 것이 바로 수륙재의 시초라고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때부터 행해졌는데, 광종(970년. 광종 21) 때 갈양사에서 개설된 수륙도량을 비롯해, 선종 때 보제사에서 수륙당을 새로 세우기도 했다.


'유교'의 나라 조선에서 불교 의식이라니? 신하들이 반대한 이유는 바로 '억불정책'

하지만 고려가 멸망하고 새롭게 조선시대가 열리게 되면서, 수륙재와 같은 불교 의식은 더이상 허용되지 않는 것이었다. 조선이 그동안 고려왕실이 숭상했던 불교가 아닌 유교를 따르는 나라로 전향하는 '억불정책'을 시행하게 되면서 불교의 행사를 금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조 4년인 1365년애 고려 왕씨의 영혼을 달래려는 수륙재가 열렸고, 1515년 중종 10년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거행하여 온 나라의 국행을 쉽게 폐지해선 안 된다'는 왕실의 시주 아래 행사가 계속 되긴 하였으나, 중종 때에 이르러 유생들의 강력한 반대에 의해 수륙제는 더이상 국행으로 거행되지 못했다.

그리고 이러한 억불정책은 놀랍게도 연산군 시대에 더 심해진다. (드라마 속 연산의 모습에서는 아직 상상할 수 없지만)그는 즉위하자마자 흥천사와 흥덕사, 대원각사를 모두 폐찰시켰으며, 승려들을 모두 노비로 만들었다. 이처럼 조선에서 억압받은 불교는 승려에게 환속이 강요되고, 이들은 깊은 산 속에 암자를 지어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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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월화특별기획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 매주 월, 화 밤 10시 공개.





iMBC 차수현 | 사진 화면캡쳐 MBC | 자료참고:한국민족문화대백과,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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