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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고향으로 향하는 한가위, 도서 <서프라이즈>로 돌아보는 '가족愛'

기사입력2016-09-1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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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바뀌어 봄에 씨 뿌리고, 뙤약볕 아래 땀 흘리며 농사짓는 손이 많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선선한 바람 불어오는 가을녘이면 추수가 한창일 너른 들판을 떠올리게 된다. 이 좋은 세상에 먹을거리가 부족해서도 아니고, 보릿고개의 추억을 곱씹는 것도 아니다. 그곳이 바로 우리네 고향, 바쁘다 핑계로 소원했던 어미와 아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추석을 맞아 가깝거나 멀거나 저마다 고향집을 찾아 오가기 바쁜 계절, 그 문턱에서 집은 책 한 권 ‘역사의 희로애락, 웃다가 울고 울다가 웃는 <서프라이즈 - 우리나라 편>' 속에 미처 몰랐던, 혹은 알고도 모른 척 했던 우리네 어버이의 모습이 고스란하다.


백정 아버지의 헌신이 낳은 '최초의 한국인 서양의'

조선시대에 천민 중에서도 최하층에 속하는지라 호적도 없었을 만큼 천대 받았던 이들이 있었다. 소나 개, 돼지 등 가축의 도살과 유통, 판매를 도맡았던 백정이다. 백정은 그들이 잡던 가축들과 다를 바 없는 대접을 받곤 했는데 더욱 가혹했던 것은 그 자식도 무조건 백정으로 살아야 했다는 점이다.

어느 날인가 백정 '성춘'은 열꽃이 일어 고통을 호소했는데 백정이라는 이유로 치료를 거부당하고 길거리에서 정신을 잃었다. 이때 그 주변을 지나던 양의사 '에비슨'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목숨을 구하게 된다. 에비슨은 조선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제중원'의 원장을 지낸 인물이다. 미천한 목숨을 살려주어 고맙다는 성춘의 인사에 에비슨은 세상에 미천한 목숨이란 없다고 답했다. 그때 곧 새로운 세상이 올 거란 희망을 품게 된 성춘은 아들 봉출이 에비슨 밑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 뒷바라지하기 시작했다.


백정 주제에 언감생심 의사 아들을 바래? 사람들은 비웃었다. 더군다나 은인이라 믿은 에비슨이 봉출에게 의학당의 허드렛일을 시키고 스스로 포기할 만큼 더 많은 일을 주라고 지시까지 했으니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자식 생각하는 성춘의 마음에 감동한 에비슨은 사람들의 반대에도 봉출을 의학당에 받아주었고 그의 사람 됨됨이를 보기 위해 일부러 궂은일을 시켰다. 아비의 마음과 스승의 생각을 읽었던 걸까? 봉출은 제 할 일을 묵묵히 해냈고, 이후 에비슨은 고종에게 청을 올려 봉출이 천민 신분에서 벗어나 의학 공부를 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리하여 1908년 스물 하나의 나이에 의사 시험을 통과,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의가 된 인물이 바로 봉출, 박서양(朴瑞陽, 1885~1940)이다.

‘백정 신분을 극복한 한국인 최초의 서양의 박서양’ 편에 소개된 그는 비천한 신분이었으나 그 누구보다 깨어있었던 아버지의 헌신과 지혜로운 스승의 도움, 그리고 본인의 끈질긴 의지 덕분에 한반도 의학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조선의 공붓벌레'를 탄생시킨 아버지의 믿음

아들이 기대만 못하면 속상하겠지만 누가 뭐라고 해도 믿고 지지해 주는 이 역시 부모다.


임진왜란 시기 진주성 대첩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던 김시민 장군의 아들로 홍문관 부제학을 지낸 '김치'는 노자가 나오는 꿈을 꾸고 아들 하나를 얻게 된다. 장차 큰 인물이 되길 기원하며 ‘노자의 꿈을 꾸고 태어난 아이’라는 뜻을 담아 '몽담(夢聃)'이라는 아명을 지어주었건만 그의 바람과 달리 몽담은 그리 총명하지 못했다.

주변에서는 안 되는 자식일랑 일찌감치 포기하고 양자나 하나 들이라 권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아둔한 아들에게 괜한 욕심을 부린다며 손가락질했다. 그러나 김치는 아들을 믿었고 병상에 누워서도 아들에게 이 한마디를 남겼다. “몽담아, 공부란 꼭 과거를 보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너는 너의 길을, 너의 공부를 멈추지 말거라.”

아비의 유언대로 몽담은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자신의 아둔함을 극복하기 위해 이해되고 외워질 때까지 반복해서 책을 읽는 공부법을 선택하였으니 그 이름 앞에 ‘조선의 독서가’ 혹은 ‘조선의 공붓벌레’라는 수식어가 붙은 백곡 김득신(金得臣 1604~1684)이 바로 몽담이다.

‘어리석음을 이겨낸 의지, 조선의 공붓벌레 김득신’ 편에 소개된 그는 59세의 나이에 소과에 합격해 평생의 꿈이었던 성균관에 입학한 인물로, 정약용, 황덕길 등 당대 최고의 지성인들이 대기만성의 상징으로 언급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 몽담이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믿음 때문이었으니, 그의 묘비에 새겨진 다음 문장이 아비의 참된 가르침을 대신하고 있다. “재주가 남만 못하다고 스스로 한계를 짓지 말라. 나보다 어리석고 둔한 사람도 없었지만 결국에는 이룸이 있었다. 모든 것은 힘쓰는 데 달렸을 따름이다.”


뜨거운 '가족애'가 써내려간 우리 역사 속 인물들

평생 한 명의 지아비만을 섬겨야 했던 조선의 법을 어기고 며느리의 재혼을 허락한 '퇴계 이황'(시대의 통념을 뛰어넘은 퇴계 이황의 됨됨이 편)과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칠거지악의 멍에를 이고 제대로 된 이름조차 주어지지 않았던 그 시절 여식에게 사내아이들과 마찬가지로 학문을 익힐 수 있도록 하여 여류작가 '허난설헌'을 길러낸 '허엽'(여자로 태어난 죄, 여류작가 허난설헌을 기리다 편)은 시대의 통념을 뛰어넘은 진정한 위인이 아닌가.

또한 아비 문종을 여읜 뒤 숙부 수양대군 손에 어린 동생 단종과 지아비마저 잃고 하루아침에 관노비로 전락한 '경혜공주'(아들을 위해 고개 숙인 여인, 경혜공주 편)는 오직 자식들의 앞날을 걱정하여 훗날 조선 제7대 왕 세조로 왕위에 오른 철천지원수 숙부를 용서했다.

한편 가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족과 떨어져 지내야 했던 천재 화가 '이중섭'(천재 화가 이중섭의 걸작, 은지화의 비밀 편)은 그림 그릴 도화지조차 넉넉하지 않아 담뱃갑 속 은지를 모아 그림을 그렸다. 독특한 질감과 색감으로 이중섭의 천재성과 실험정신을 더욱 극적으로 보여주는 그의 작품은 ‘은지화’라는 새로운 장르로 탄생하게 되는데 그 그림에 주로 등장하는 피사체는 소년들, 짐작컨대 이중섭이 그토록 그리워한 그의 두 아들일 것이다. 이중섭의 작품이 오늘날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전하는 까닭은 그의 그림 속에 담겨 있는 애절한 가족애 때문은 아닐까?


머리 좀 컸다고 부모 마음 서운하게 한 것이 자꾸만 생각난다. 미안한데 속마음 표현하는 건 어찌 그리 어색한지 모르겠다. 대도시에서 나고 자란 이들이라고 다를까. 가까이에 있어도 이 핑계 저 핑계로 자주 만나지 못했기에 추석을 빌어 조금이라도 빨리 달려가고 싶은데 막상 얼굴 마주하면 데면데면. 그럼에도 서운한 기색 내비치지 않고 그저 자식 잘 되길 바라는 것이 또한 부모 마음이니 책장을 넘기며 시대가 바뀌어도 변치 않는 그 뭉근함을 읽을 수가 있어 좋더라.





iMBC 취재팀 | 자료제공=MBC C&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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