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푸터(고객센터 등) 바로가기

[광복절 특집] 반드시 '오늘'이어야 하는 드라마, 詩人이육사의 찬란한 삶 <절정>(2011)

기사입력2016-08-15 13:03
  • 트위터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링크 복사하기
광복절 특선 드라마 2부작 <절정>(2011)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이육사 - 절정(絶頂.1940)

아무도 빛의 존재를 믿지 않았던 암흑의 시대, 우리나라가 거쳐 온 아픈 역사를 되돌아볼 날이 찾아왔다. 애환과 고통 속에 가슴 속에 저마다의 태극기를 품고 독립을 외쳤던 오래지 않은 옛날, 어느덧 광복 71주년인 2016년. ‘절정’, ‘청포도’, ‘광야’ 등 시인으로 이름난 ‘이육사’의 짧지만 굵었던 찬란한 삶이 특선 2부작 드라마 <절정>에 담겼다. 2011년 방영된 작품이지만, 이맘때면 언제나 시청자들의 가슴에 명작으로 회자되며 재조명되고 있다.


가수 신화의 멤버에서, ‘배우’라는 이름으로 이육사의 삶을 다시 쓴 김동완의 변신과 대세 여배우가 된 극중 육사의 아내 안일양 역의 서현진의 연기 호흡, 그 밖에도 혼돈의 시대 속에서 저마다의 삶을 고민하며 현실에 쫓고 쫓기는 인물들의 갈등을 비롯해 희망을 찾으려 노력했던 시인 이육사의 삶이 2부작이라는 짧은 호흡 속에서도 아름답게 묻어나 있다. 특히 2012년 미국 제 45회 휴스턴 국제 영화제의 특집극 부문에서 대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면서 대외적으로도 많은 박수를 받기도 했다.




노윤희: 일본이 없는 조선에 대해선, 잘 모르겠어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였으니까요. 지금과는 다른 조선의 미래가 뭔지, 그려지지도 않아요.

이육사: …….

노윤희: 우리가 하는 일은 마치 해를 달로 바꾸는 일 같아요.

이육사: 여긴 북촌종로통 거리요. 볼이 발그레하고 통통한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있소. 한국 식민선서를 외우지 못했다고 따귀를 때리는 일본의 선생 따위는 없소. 선생한테 맞고 고막이 터져, 귀에 붕대를 감고 다니는 아이들도 없소. 선생을 따라 '가갸거겨고교'를 배우던 아이가 창밖을 보오. 하늘이 높고, 구름이 흐르오. ……그렇게 새로운 날이오.

노윤희: …….

이육사: 조선의 미래는, 있소.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이육사 - 청포도(靑葡萄.1939)

이육사: 세주, 자네 말이 맞았네. 나에겐 분노가 없네. 나를 타오르게 하는 것은 분노가 아니었네. 그것은, 슬픔이네. 지독한 슬픔. 세주, 또 다시 전쟁이 났네. 지독한 슬픔의 광풍이 몰아치려 하네.

나라를 잃은 시절, 청포도라는 사물을 통해 이육사는 고국을 향한 끝없는 향수, 청포도를 입고 찾아올 '밝은 희망'을 염원했다. 민족의 암울한 현실 앞에서도 그의 정신은 시(詩)라는 읊조림을 통해, '지독한 슬픔의 광풍'에도 꺾이지 않는 정신을 그려냈다.




박이만: 내일이면 북경 일본영사관 감옥으로 이송될 거요. 그곳에 가면, 설사 모든 사실을 자백해도 당신 목숨은 보장할 수 없소. 그러니 모든 걸 내게 말하시오. 무기 반입에 관련된 자들을 모두 내게 말하면 당신은 구해주겠소.

이육사: …….

박이만: 당신과, 당신 시(詩)를 구해주겠단 말이오.

이육사: 그렇게 목숨을 부지하면 내 시도 죽는 것을. 무슨 수로 한 쪽만 살린단 말이오.

박이만: …….

이육사: 난, 보고도 못 본 척 할 수 없소. 알면서도 모르는 척, 듣고도 못 들은 척, 슬프면서도 안 슬픈 척, 화났으면서도 화가 나지 않은 척, 고통스러우면서도 고통스럽지 않은 척, 할 수 없단 말이오.

박이만: …….

이육사: 나는, 시인이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굉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 목놓아 부르게 하라.


이육사 - 광야(曠野. 1945)

이육사의 말년, 유고로 전해진 시, ‘광야’는 그의 후기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손꼽힌다. 춥고 괴로운 흰 눈으로 덮인 암담한 현실을 극복하려는 그의 정신이 깃들어 있으며, 먼 훗날 나타날 구원(초인)을 기다리는 믿음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 삶이 꺾이려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이육사의 시 안에는 노래의 씨가 피어올린 매화향기가 가득하다.



이육사: 날 때부터 발에 쇠고랑을 찬 채 평생 다리도 펼 수 없는 작은 감옥에 살던 사내가 있었습니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이곳이 세상의 전부려니, 별 불평도 없이 살았는데 말입니다. 딱 하루. 창이 열리더니, 달을 보게 되었습니다. 사내는 그만 달빛을 사모하게 되었지요. 이제 평생 달빛을 볼 수가 없는데 말입니다. 달빛을 보게 된 건, 사내에게 잘 된 일입니까, 아니면 잘 안 된 일입니까?



친구들과 함께한 이육사의 모습(좌), 1930년대 후반 이육사의 모습(우) <한국문학관 제공>

1904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난 이육사는 1925년 독립운동단체 의열단에 가입해, 1927년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때의 수인번호 ‘264’는 지금의 호가 되었고, 이후에도 독립운동과 시를 병행해 활동하였다.


시대의 흐름에 몸을 맡겨, 고통스러운 가시밭길이 아닌 평탄하고 무난한 삶을 살 수도 있었다. 그저 그렇게 피어나 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고국의 해방이라는 희망의 빛을 만났던 순간 그는 시인의 운명을 택했다.


식민지의 그늘 아래 신음하는 나라에서 더 이상 고개를 돌릴 수가 없고, 마음이 가지 않은 길에는 발을 딛을 수 없었던 이육사의 길은 안타깝게도 1944년, 일제강점기 해방을 일 년 앞두고 끊어지고 만다. 하지만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도 끝까지 민족의 자긍심과 시인의 양심을 지키며 일제에 항거한 그의 정신은 아직도 그의 작품 속에서 숨 쉬고 있다.


박이만: 네가 쓴 글을, 몇 자락 읽었다. 꽤 쓸만하더군. 그런 재주로 세상에 나간다면 뭔들 이루지 못하겠나. 뭔들 얻질 못하겠나. 네가 애지중지하는 조선 백성들은, 네가 지금 여기서 허물어지고 있는 것도 모른다.


광복과 함께 독립군들의 전쟁도 마무리 되었다. 자유를 향한 열망 아래, 이육사가 기다리던 초인도, 그가 뿌린 노래의 씨앗도 희망의 싹을 틔웠다. 시간은 아득히 멀어져가고, 이제 대한민국은 71년이 광복절을 맞이하고 있다.

이따금 들려오는 역사 인식의 부재의 논란들이 안타깝게 들려오는 현실이다. 하지만 캄캄한 어둠의 시대, 희망의 빛을 놓지 않았던 선조들의 피와 땀이 있었기에, 우리는 그들이 만든 평화로운 세상 속에 살고 있다. 그들이 열망했던 광복의 하늘 아래, 오늘 자유를 위해 허물어진 그들의 삶을 다시 기억하자.

☞ 광복특집 2부작 <절정> 다시보기




iMBC연예 차수현 | 사진 화면캡쳐 MBC, MBC | 자료출처: 이육사 문학관, 두산백과

※ 이 콘텐츠는 저작권법에 의하여 보호를 받는바, 무단 전재 복제, 배포 및 이용(AI학습 포함)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