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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정실록] 숫자로 보는 인목대비의 삶! 9살 많은 아들과의 엇갈린 운명

기사입력2015-06-03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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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창사 54주년 특별기획드라마 <화정>과 함께 하는 조선시대 역사 읽기. 여덟 번째로 인목왕후의 생애를 다룹니다.




이 모든 수모와 치욕을 다 견뎌줄 것이다.
그리고 갚아줄 것이야.
반드시 내 발 아래에서 나와 같은 피눈물을 쏟게 할 것이다.


선조, 광해군, 인조 3대에 걸쳐 혼란스러운 역사의 중심에 있었던 인목왕후. 4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인목왕후는 하늘과 땅, 천국과 지옥을 오가며 바람잘 날 없는 삶을 살았다. 광해군에게는 왕실 법도 상 어머니였지만, 훗날 그를 가리켜 "한 하늘 아래 같이 살 수 없는 원수"라고 부르게 된 인목왕후에게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 생애를 숫자로 풀어보았다.



부부의 연을 맺은 선조와 인목왕후의 나이 차이는 32살



1600년, 30년 동안 아이를 낳지 못했던 의인왕후가 병으로 죽음을 맞이하고 1602년 선조의 둘째 왕비가 책봉되었다. 이때 인목왕후의 나이는 19세, 선조는 51세였는데 이는 당시까지의 왕과 계비 중 가장 많은 나이 차였다.

이후 인목왕후가 1603년 정명공주를, 1606년 영창대군을 차례로 낳으며 비로소 왕실에 적장자(嫡長子)가 탄생했다. 선조는 생전에 8명의 후궁에게서 14남 11녀의 자녀를 낳았지만 적자는 영창대군이 유일했기에 그를 특별히 아꼈다. 그러나 세자 교체를 생각하던 선조가 급작스럽게 사망하면서 광해군과 인목왕후의 운명은 하루 아침에 뒤바뀌게 된다.



이제 누가 이 아이들을 지켜준단 말입니까!



아들보다 9살 어린 어머니 인목왕후



1608년 광해군이 제 15대 국왕으로 즉위했을 당시 광해군의 나이는 34세, 인목대비는 25세였다. 법적으로는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이지만 선조 대부터 왕위를 둘러싼 갈등이 지속되며 두 사람은 불편한 동거를 이어갔다. 그러다 1613년 계축옥사로 김제남이 역모에 휘말려 처형되고,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유배된 후 이듬해 증살당한다. 이로써 인목대비는 아버지와 아들을 모두 잃게 된 것이다.


백지묵서금광명최승왕경 ©국립중앙박물관
인목대비가 광해군 14년(1622)에 손수 필사한 사경으로 부처님의 말씀, 즉 가르침을 뜻하는 법보(法寶)로, 친정아버지와 아들 영창대군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30세에 아버지를, 31세에 아들을 잃고 경운궁으로


결국 1615년 인목대비는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에 유폐되고, 1618년부터 모든 격식을 낮추는 조치가 취해진다. 경운궁은 서궁으로 격하되고, 대비의 호칭도 빼앗긴다. 이후 계속되는 인목대비 폐위 요청에 광해군은 "다시는 폐(廢)라는 글자를 거론하지 말라"고 거절했지만 인조반정이 있었던 1623년까지 인목대비는 이곳에서 비참한 생활을 이어가게 된다.


『계축일기』에 따르면 내인들은 솜도 없이 겨울을 지냈으며 쓰레기를 버릴 만한 곳이 없어 악취가 가득하였고 구더기가 방안과 부엌에 가득할 정도였다고 한다. 물론 『계축일기』가 인목대비 측의 입장에서 서술되었기 때문에 과장이 보태어졌을 수 있으나 당시의 힘들었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덕수궁 ©문화재청
덕수궁은 선조가 1593년 임진왜란으로 피신을 갔다 서울로 돌아와 거처하면서 궁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다. 이후 광해군 시대 '경운궁'이라는 이름이 주어졌고, 인목대비가 이곳에 유폐되기도 했으며, 인조가 즉위한 궁이기도 하다.




40세에 비로소 왕실 최고 어른의 대접을 받고 36가지 죄목을 열거하다


그러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면서 인목대비와 광해군은 또 한 차례 운명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광해군은 강화도로 유배를 떠났고, 인목대비는 왕실의 최고 어른으로 복위된 것. 인조에게 즉위 교서를 내린 인목대비는 광해군의 죄를 36가지나 나열하며 쌓여온 원한을 표출했다.


계해정사록 ©한국콘텐츠진흥원
『계해정사록』은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을 일기체로 편집한 책으로, 서궁에 유폐되었다가 인조반정 때 풀려난 인목대비의 비망기가 실려 있다. 그 내용에 따르면, 인목대비는 언문으로 내린 교서에서 36가지로 광해군의 죄를 지목하는 등 그를 처형하고 싶어 했다.



인목대비가 열거한 36가지 죄목은 아래와 같다.



역적 괴수 포학한 혼(琿)은 천지에도 없는 대역무도로 하늘에 죄를 얻었으니, 죄 하나이다.
종묘 사직에 죄를 지었으니, 죄 둘이다.
군부(君父)가 병중인데 위협해서 죽였으니, 죄 셋이다.
형을 무함하여 대역으로 몰아 죽였으니, 죄 넷이다.
적자(嫡子)인 동기를 죽였으니, 죄 다섯이다.
모후(母后)를 유폐시켰으니, 죄 여섯이다.
화를 꾸미려고 간신들과 모책하여 모후를 협박하였으니, 죄 일곱이다.
부도한 마음이 날로 달로 더해져서 모후를 폐출하려 했으니, 죄 여덟이다.
여우같이 아첨하고 기망했으니, 죄 아홉이다.
스스로 백가지 염고(魘蠱)와 저주로 모후를 독해하였으니, 죄 열이다.
수화(水火)를 불통케 하고 군졸로 엄중 단속하여 모후를 죽이려고 때때로 공갈하였으니, 죄 열 하나이다.
모후를 죽이려고 도깨비를 궁중으로 쫓아 넣고 역질을 몰아들였으니, 죄 열 둘이다.
모후의 집을 적몰했으니, 죄 열 셋이다.
국구(國舅)를 대역으로 거짓 꾸며서 모후의 일문을 멸망하였으니, 죄 열 넷이다.
하늘을 속이고 업신여겼으니, 죄 열 다섯이다.
천자를 기망하였으니, 죄 열 여섯이다.
예를 버리고 의리를 배반하였으니, 죄 열 일곱이다.
은혜를 저버리고 덕을 잊었으니, 죄 열 여덟이다.
천도를 어기고 인륜을 폐하였으니, 죄 열 아홉이다.
선을 버리고 악을 취하여 패륜을 마음대로 하였으니, 죄 스물이다.
조종의 큰 제도를 어겼으니, 죄 스물 하나이다.
백성들의 고혈을 빨았으니, 죄 스물 둘이다.
선성(先聖)을 능멸히 여겼으니, 죄 스물 셋이다.
옥사와 관작을 팔아서 뇌물을 공공연하게 행하였으니, 죄 스물 넷이다.
효경(梟獍)같은 마음으로 골육지친을 모두 제거하였으니, 죄 스물 다섯이다.
무고한 생령들을 살해하였으니, 죄 스물 여섯이다.
늘 토목의 역사를 그치지 않아서 백성에게 죄를 지었으니, 죄 스물 일곱이다.
외척에게 현혹해서 종친을 등졌으니, 죄 스물 여덟이다.
역적의 당류들을 조정에 나열하였으니, 죄 스물 아홉이다.
음녀를 시켜서 모후를 궁중에 잡아놓고 곤욕을 한없이 하게 하였으니, 죄 서른이다.
선왕의 후궁들을 살해하였으니, 죄 서른 하나이다.
부왕과 모후의 궁인을 무수히 살해하였으니, 죄 서른 둘이다.
선왕의 후궁을 강간하였으니, 죄 서른 셋이다.
중형(重刑)의 죄수들을 수레로 실어다가 모후의 궁중에 끌어넣어 위협으로 곤욕보여 놀라게 하였으니, 죄 서른 넷이다.
선왕 능을 파헤쳤으니, 죄 서른 다섯이다.
모비의 젖먹이 어린 것을 앗아다가 살해하였으니, 죄 서른 여섯이다.
죄는 옛날 주왕(紂王)ㆍ양제(煬帝)보다 더한 것은 경 등도 아는 바이라. 원한가진 이 몸이 10여 년을 쇠독 같은 데 있어서 세상 소문은 듣지 못하여, 역시 역적 괴수의 백 가지 죄를 알지 못하고 겨우 한 가지만 알았는데, 경 등이 그 죄를 숨기지 않고 위로 종묘 사직에 고유하고 아래로 생령을 소생시켜 주니, 원부의 소원이 끝났도다.



19세의 나이로 궁에 들어와 갖은 풍파를 겪었던 인목대비는 결국 복위 후 채 10년을 더 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다. 장유는 『계곡집』을 통해 "아름다운 덕의 소유자로서 사려가 깊고도 원대하였"던 인목대비가 "국모로서의 성대한 봉양"을 얼마 누리지 못하고 죽음에 이른 것을 안타까워하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한편, 정명의 등장과 함께 다시 한 번 격한 대립을 예고한 인목대비와 광해군의 비극이 과연 앞으로 <화정>에서 어떻게 묘사될 것인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이 기사는 공공누리, 국립중앙박물관, 문화재청, 한국고전번역원,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개방한 공공저작물을 참고하여 작성되었습니다.




iMBC연예 김은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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