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유성은 25일 오후 9시5분쯤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고인은 최근 폐기흉 증세가 악화해 전북대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던 중 딸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망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에 마련되며 장례는 희극인장으로 치러진다.
가수 남궁옥분은 "8월 28일 오빠(전유성) 딸 제비가 운영하는 남원 인월의 카페에 오빠 뵈러 가서 마지막 뵙고 왔는데 이리 빨리 가실 줄은 몰랐다"며 "어제도 전대 병원 응급 상황에서도 근력 운동 하시라는 카카오톡에 밤 9시 4분에 '응'이라는 답을 주신 뒤 하루 만인 오늘 밤 9시 5분에 가셨다. 연명치료도 거부하시고 따님 제비와 얘기도 많이 나누시고 전유성답게 떠나셨다"고 적었다.
이경실은 "우리 코미디계 개그계의 거목 큰 오빠가 돌아가셨다. 수요일 녹화가 끝나고 ‘지금이 아니면 늦을 것 같다’는 생각에 출발했다. 5시30분쯤 전북대병원에 도착해 오빠를 뵐 수 있었다"며 "오빠의 가족 따님‧사위와 함께 후배 김신영이 떠나질 않고 물수건을 갈아가며 간호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오빠는 열이 나는지 환자복 바지를 걷어 올리고, 물수건으로 열을 내리며 산소호흡기를 하고 계셨다. '우리 오빠 섹시하게 누워 계시네?'라고 농담을 건네니, '너희들 보라고 이러고 있지'라더라"고 마지막까지 유머를 잃지 않은 선배와의 일화를 전하기도. 그는 "오빠와 짧지만 깊은 얘기를 나눴다. '와줘서 고맙고 난 너희들이 늘 자랑스럽다. 건강해라'더라. 한마디라도 나에게 더 전하려 애썼다. 난 눈시울이 붉어지는 걸 감추려 오빠 손을 물수건으로 닦아드렸다. 저절로 기도가 나왔다. 숨 쉬는 걸 힘들어 하셔서 너무 안타까웠다. 오빠, 수고하셨다. 오빠의 삶은 멋지고 장했다. 이제 아프지 마시고 편안하게 잠드시길. 오빠와 함께하는 시간은 늘 행복했다. 즐거웠고 고마웠다. 늘 그리울 거다. 안녕 오빠. 잘 가요"라고 인사했다.

조혜련은 "유성 오빠의 손 잡고 기도할 수 있어 감사했고 기도 끝에 오빠가 '아멘'을 해서 감사했다. 내가 드린 가죽 십자가를 손에 꼭 쥔 채 마지막까지 성경을 읽고 찬송가를 들어서 감사했다"며 "하나님 우리 딸 잘 부탁드립니다. 하나님 존재를 왜 이제서야 알게 됐는지 너무 후회됩니다'(라고)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오빠가 스스로 소리 내 회개 기도를 하셔서 감사했다. 평생을 하나님 존재를 부정했던 오빠. 이성미 언니의 생명책 첫 번째가 전유성 오빠였는데 38년을 버티다 마지막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으며 받아들인 건 정말 하나님의 기적"이라고 밝혔다.
이어 "많은 동료와 후배들이 오빠를 위해 오랫동안 기도했는데 결국 그 기도가 이뤄졌다. 이제 오빠는 천국으로 갔고 하나님 품에 안겼다. 오빠는 지금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을 하고 계실 것"이라며 "오빠가 마지막에 깨달은 그 진리를 모두가 알게 되길 소망한다. 힘든 국민들이 웃을 수 있게 개그를 만들어줘서 감사하다. 존경한다. 사랑한다. 우리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라고 덧붙였다.
부산국제코미디페스티벌조직위원회(이하 '부코페') 측은 "선생님은 '개그맨'이라는 명칭을 직접 창시하시고, 한국 최초의 공개 코미디 무대와 개그 콘서트 실험 무대를 선보이며 한국 코미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라며 "1970년대부터 대중에게 사랑받아 온 선생님은 재치와 풍자, 따뜻한 유머로 시대를 관통하며 웃음의 가치를 일깨워 주셨다"라고 고인의 업적을 높이샀다.
이어 "방송과 무대를 오가며 수많은 명장면을 남기셨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후배 개그맨들에게 든든한 스승이자 멘토로서 영감을 주셨다"라며 "특히 아시아 최초이자 최대 규모의 코미디 페스티벌인 부산국제코미디페스티벌이 만들어지는 데 주춧돌이 되어주셨고, 한국 코미디가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도록 앞장서 전파하셨다"라고 얘기했다.
부코페 측은 "선생님은 언제나 '최초'라는 수식어와 함께, 늘 새로운 길을 개척해 온 한국 코미디의 선구자셨다"라며 "웃음을 통해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고, 힘겨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건네주셨던 선생님의 발자취는 한국 코미디 역사 속에 길이 남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1949년 서울 종로구 안국동에서 태어난 그는 서라벌고등학교,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연출과를 졸업한 전유성. 탤런트 시험에서 4번 연달아 낙방한 뒤 코미디계 문을 두드렸다. 인기 MC 겸 코미디언이었던 '후라이보이' 곽규석을 찾아가 희극 작가로 출발했고, 1969년 TBC '쑈쑈쑈'의 작가로 일했다. 이후 KBS '유머 1번지', '쇼 비디오 자키' 등에 출연해 촌철살인 개그로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특히 미국에서 익살을 뜻하는 영어 단어 '개그(gag)'와 남자를 뜻하는 '맨(man)'을 합친 '개그맨'이라는 새 용어를 대한민국 최초로 사용한 사람이기도 하다.
iMBC연예 이호영 | 사진출처 랄랄라온, 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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