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7일, 스위스 세계경제포럼(WEF)의 세계 성 격차 지수 보고서에서 매긴 한국의 남녀평등 수준이 전체 134개국 중 115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일부 언론에서는 다른 조사를 언급하며 지나치게 저평가된 것이라고 하지만 요즘 뜨는 TV 프로그램들을 보면 그저 웃어넘기기에는 좀 찜찜한 면이 있다.
케이블 방송 <재밌는 TV 롤러코스터>에서 ‘남녀탐구생활’이 큰 화제가 되고 있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그야말로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이 프로는 정형돈과 정가은의 실제 같은 연기에 웃음이 터져 나온다. 그들이 마치 이 시대의 모든 남성과 여성을 대표하는 것처럼 착각하게 돼 정말 남자들이 저렇게 더러운가, 혹은 여자들이 저렇게 자기밖에 모르며 혼자 깔끔한 척 다 하는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웃자고 만든 프로그램이라 과장도 심하고 그게 전부는 아니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남성과 여성을 이해하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되지 않을까 염려가 된다. 특히 이 프로의 재미를 더하는 것은 중성적인 혹은 중립적인 목소리의 내레이션이 등장하는 것인데 잘 들어보면 인간이 아닌 기계가 추잡한 인간의 속사정을 조롱하는 것만 같다. 그것을 보며 깔깔대는 우리들의 심리에 서로에 대한 공격성이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

좀 더 직접적으로 공격성을 나타내는 프로그램도 있다. KBS <개그콘서트>의 ‘남성인권보장위원회’가 그것이다. 이 코너에서는 ‘황현희 PD의 소비자 고발’에서 억지로 고발하고 마구잡이로 판매자를 욕보였던 황현희가 주동자가 돼 남성들의 권익 보호에 나선다. 방청객들까지 동원해 시위에 나선 이들을 보며 웃게 되는 이유는 뭘까. 남성들의 입장에선 속 좁아 보일까 봐 내색 못했던 여자친구 뒷담화를 실컷 해주니 시원할 것이고 여성들의 입장에선 되게 통 큰 척, 선심 쓰는 척하던 그들의 쪼잔한 모습을 보면서 실소를 터뜨리는 것이 아닐까. 화가 나서 웃고 어이없어 비웃고. 서로를 은근슬쩍 비난하며 공격적인 웃음을 유발하는 이 코너 또한 남녀간의 이해와 화해에 초점을 맞췄다기보다는 쌓인 감정의 해소에 가깝다.

분석심리학의 창시자 칼 융은 성역할에 대해 의식과 로고스, 즉 이성을 남성적인 것과 대등한 것으로 또 무의식과 에로스, 즉 감성을 여성적인 것과 대등한 것으로 봤다. 그의 이론에 등장하는 아니마와 아니무스라는 용어는 남성과 여성 각자의 내면에 숨겨진 반대 성을 가리키며 그것을 인식할 때 균형 잡힌 인격의 발달이 가능하다고 했다. 몇 년 전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책,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에서 말하는 것처럼 분명 여성과 남성은 다르며 그 차이를 인식하고 서로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은 곳을 들여다본다면 사실 별반 차이가 없는지도 모른다. 서로 다른 것을 이해하는 것은 머리로 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금세 잊어버리고 또다시 분란을 일으키기 쉽지만 서로 같은 것을 마음으로 공감하는 작업은 시간을 들여야 하는 만큼 그 파장은 오래갈 것이다. TV를 통해 서로 다른 성에 대한 공격성을 발산하는 프로그램과 더불어 서로의 공통점을 깨닫고 인간다움을 공감하는 기회도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개그 프로가 있다면 엄청 재미가 없겠지만 이렇게 계속 가다간 진정한 양성평등 사회가 오기 힘들 것 같아서 말이다. 글 이계정(칼럼니스트, 심리상담전문가) | 사진제공 TVN, KBS
※ 이 콘텐츠는 저작권법에 의하여 보호를 받는바, 무단 전재 복제, 배포 및 이용(AI학습 포함)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