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이든 생물학이든 진화론자들은 진화의 조건을 환경과 의지로 꼽는다. 생물체도 마찬가지고 기업도 마찬가지다. 개인적으로 이런 의견에 동의하는데 진화를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요즘 케이블 채널의 리얼리티 쇼에 대해서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닌 게 아니라 요새 내가 열심히 보고 있는 TV 쇼들은 대부분 케이블 채널의 리얼리티 프로그램들이다. 그것도 ‘수입품’이 아니라 ‘내수용’으로 만들어진 프로그램들인데, QTV의 <예스 셰프> <포토그래퍼>와 온스타일의 <디 에디터스> 등이 그렇다. 특히 <디 에디터스>는 비슷한 분야의 직업을 다루는 프로그램이라 더 관심을 가지고 보고 있다. 작년 겨울에 방영한 <엘르> 매거진의 패션 에디터를 뽑는 리얼리티 쇼 <스타일리스타: Real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도 생각나고, QTV의 <열혈 기자>와도 비교할 부분이 많다는 생각이다. 무엇보다 <디 에디터스>는 국내 최고의 퀄리티를 자랑하는 <더블유 코리아>를 다루며 패션 에디터들의 업무에 초점을 맞춘다는 게 신선하다.

경험적으로 얘기하자면, 최근 몇 년 동안 한국 대중문화를 소개하거나 비평하는 작업은 전문지의 영역에서 패션지의 피처 섹션으로 이동했다는 생각을 한다. 아마도 패션의 정의를 보다 광범위하게 설정하면서 가능해진 것 같은데 그만큼 한국 혹은 서울의 문화적 인프라가 확장된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영화나 TV, 음악이나 ‘핫 플레이스’ 같은 정보들을 취하는 데 패션지가 유용하기도 하다. 그렇다 보니 패션지에 대한 수요도 늘고, 그곳에서 일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느는 것 같은데, 문제는 패션지, 혹은 잡지가 다루는 콘텐츠가 화려하다 보니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화려할 것이라는 선입견이 작동한다는 점이다. 역시 경험적으로 말하자면, 잡지에서 일하는 건 생각만큼 화려하지도 않고 ‘뽀대’ 나지도 않는다. 아무리 유명한 셀러브리티를 인터뷰한다고 해도 그건 ‘일’이고, 좋은 에디터란 그 ‘일’을 잘해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대책 없는 살인적 스케줄과 기획 아이템에 대한 압박은 너무 당연해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지경이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나 <스타일> 같은 영화, 드라마에 등장한 에디터들과는 격이 다른 것이다.



그래서 <디 에디터스>를 비롯한 일종의 ‘직업 리얼리티 쇼’를 보면서 드는 생각은, 외형보다 중요한 건 진심이고, 그 진심을 받쳐주는 건 기본적으로 성실함과 노력(자기계발)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어떤 분야에서 일을 하든 중요한 건 그가 입고 있는 옷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일에 대해 갖고 있는 태도인 것이다. 잡지 에디터가 멋있게 보일 때, 그를 멋있어 보이도록 만드는 건 결국 그 사람이 자기 직업에 대해 가지고 있는 프라이드 때문이다. 그 프라이드를 받쳐주는 건 그의 실력, 일을 처리하는 능력이다. 일을 처리하는 능력은 결국 일에 대한 애정과 비례한다. 어떤 일이든, 어디에 있든 내가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해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디 에디터스>는 잡지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데 충실하다. 핵심은 경쟁자들을 ‘기본은 하는 에디터’로 키워내는 것이지만, 카메라가 그들을 비추는 틈틈이 ‘잡지를 만드는 일’에 대한 <더블유 코리아> 에디터들의 태도가 드러난다. 이를테면 현장에서 모델이나 사진작가들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 평가 시간에 예리하게 드러나는 관찰력 같은 것들이 그렇다. 갑자기 떨어진 화보 촬영 미션에서 모델을 놓친 팀이 직접 화보 모델에 나선 경쟁자에게 던진 “사약을 내려야 해”라는 살벌한 위트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디 에디터스>를 비롯한 케이블 리얼리티 쇼들은 지금 한국의 리얼리티 쇼를 만드는 노하우가 물이 올랐음을 반영한다. 만드는 사람들이 그 직업군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있지 않으면 나오기 힘든 장면들이 등장한다. 그것은 기획의 결과다. 그러니까 리얼리티 쇼를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어떤 부분에 집중해야 할지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잡지 에디터가 되고 싶다거나 포토그래퍼가 되고 싶다거나 혹은 신문기자가 되고 싶다면 반드시 리얼리티 쇼를 챙겨봐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글 차우진(칼럼니스트) │ 사진제공 온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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