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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스타] 김희애, 건강한 밝은 에너지가 팡팡 터지는 매력여신

기사입력2018-06-15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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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치지 않을 거예요’ ‘특급 칭찬이야’ 등 여배우로는 드물게 명대사 리스트를 갖고 있는 김희애다. 1983년 영화 ‘스무해 첫째날’로 데뷔한 이후 1986년 연기대상 신인상을 수상하며 80년대 중후반 손꼽히는 신세대 스타였다가 바로 1990년 연기대상 최우수상, 1991년부터 2007년까지 연기대상 대상과 10대 스타 상 등을 휩쓸고, 잠시 공백기가 있었지만 ‘꽃보다 누나’와 ‘밀회’로 화려하게 컴백해 이후 영화, 드라마를 오가며 장르 불문, 직업 불문의 캐릭터들을 소화하며 배우 김희애라는 이름을 다시 쓰고 있는 인물이다. 기자에게는 ‘나를 잊지 말아요’라는 히트 송의 가수이기도 한 김희애는 나이 들어도 늙지 않는 단아하고 우아한 여자라는 이미지가 강했는데, 영화 ‘허스토리’를 계기로 한 인터뷰 자리에서 만난 김희애는 놀랄만한 반전 매력의 소유자였다. 여전히 조근조근 조용한 말투지만 빵빵 터지는 유머 감각에는 세상을 바라보는 밝고 긍정적인 관점이 고스란히 묻어나 함께 이야기 하는 사람을 무장해제 시키는 힘이 있었다. 억지로 꾸미지 않아도 저절로 예뻐 보이고, 심각한 이야기 끝에도 삶의 해학이 묻어나는 정말 멋진 사람이었다. 위안부 할머니들과 부산여성경제인 협회가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오가며 외롭고 힘겹게 치뤘던 관부 재판의 실화를 다룬 영화 ‘허스토리’와 함께 배우 김희애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Q. 영화 '허스토리'를 개인적으로 조금 힘들게 봤다. 소재 때문이기도 했지만 편하게 즐기며 볼 영화는 아니었고, 그래서인지 마음이 무거웠다. 연기 하시기도 힘들었을 것 같다. 완성된 영화 보신 소감이 어떠셨나?
A. 언론 시사회때 관객 인사만 하는 줄 알았는데 들어가서 영화를 보라고 하더라. 그제서야 영화도 본다는 걸 알았다. 얼결에 가서 봤는데... 100% 만족하기는 어렵다. 배우이니까 매번 작품마다 다른 캐릭터를 준비해야 하는데 이번 영화에서는 특히나 달랐던 역할이었다. 더군다나 부산 사투리에 일어도 해야 하고 할머니들과 같이 해야 하는 어려운 면이 있어서 큰 도전이었다. 연기적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인정받고 싶은 게 아니라, 제가 쌓아온 커리어가 한 순간에 망신당하겠구나 싶은 두려움이 있었다.

Q. 무엇 때문에 두려웠나?
A. 사투리 때문이다. 오락성 드라마였다면 '이번에 망신당하고 말자' 하고 덮었을 텐데 열악한 환경에서 믿을 수 없는 일을 겪으신 분에 대한 이야기였기에 최대한 진심을 가졌어야 했고 사투리도 되야 했고 연기도 되어야 했다. 그런 면에서 힘들었다. 실제 그 분들이 겪은 걸 생각하면 한낱 언어쯤이야 '할 수 있다!'라고 마음을 다 잡았지만 부산 사투리는 결정적인 함정이었다. 중간에 도저히 안 되겠어서 서울 사람으로 설정을 바꾸면 안 되나 라는 생각도 잠깐 했었다. 너무 쉽게 생각했었다. 그 동안 경상도 출신 배우들이 쌓아 놓은 게 많아서 금방 표가 나고, 관객들의 눈높이도 높아져 있어서 힘들더라.

Q. 사투리 연기는 그 동안 안 해 보셨나?
A. 사투리 연기 제안은 한 번도 없었다. 내가 워낙 도시적인 외모에 우아한 이미지여서 그랬는지. (웃음) 하도 좀 아까 인터뷰 하신 기자들이 저한테 우아하다고 했어서... 캐스팅 제안이 오고 사투리와 일본어를 준비하는데 딱 3개월 밖에 시간이 없었다. 사투리 선생님이 따로 계셨고, 그 분과 아침, 점심, 저녁 통화하며 녹음도 하고 배웠었다. 사투리 선생님이 좀 젊으신 분이었는데 캐릭터가 살짝 의심이 들어서 그 분의 이모님의 우아한 버전, 친구의 왈가닥 버전, 어머님의 구수한 버전, 애교 있는 버전 등 주변 분들과도 통화하며 여러 가지 사투리 버전을 배웠다. 일본어야 말로 억지로 엉망진창으로 했다. 일본어를 한글로 발음 나는 대로 적었는데 처음에는 그것 조차도 잘 못 읽겠더라. 성조가 있는데 그걸 모르니까. 제가 평소에 기억력이 없는 편인데, 너무 달달 외워서 지금도 외울 정도다. 단기 기억에서 장기 기억으로 넘기기 위해 적은 분량을 반복 반복, 계속 반복해서 외웠다. 일본어 한 줄 대사를 일주일씩 걸려서 외웠었다.


Q. 실존 인물을 연기 하는 것이라 더 힘들었을 것 같다.
A. 맞다. 그분들에 대한 자료도 찾아보고 그랬는데 제가 연기한 '문정숙'선생님은 일어를 되게 잘 하시는 분이셨다. 그래서 누가 되지 않으려면 일어를 잘 해야 했고, 재판장에서도 더 어필할 수 있게끔 해야 했는데 힘들더라. 그 선생님의 기록 사진을 보니까 그 시대이지만 멋스럽게 액세서리도 하시고 하는 모습을 보면서 최대한 비슷하게 하려고 애를 썼다.


Q. 시나리오의 어떤 점에 끌려서 작품을 선택하신 건가?

A. 부끄럽지만 이 영화를 할머니에 대한 사명감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냥 한 여성이 인간으로 할머니를 도와드리는 모습이 좋았다. 할머니들의 상황이 얼마나 약자 중의 약자인가? 나이도 드셨고 힘든 일도 겪으셨는데 정부의 도움 없이 어떤 여자만 따라서 일본의 재판장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당당히 말하는 모습이 제 마음을 움직였고, 감동적이었다. 그래서 좋았었다. 할머니들 이야기는 좀 피하고 싶고, 마음이 안 좋아서 그러고 살았다. 시나리오를 보고 선택한 것도 '할머니를 위해 내가 나서야지'는 아니다. 그냥 많지 않은 여성소재의 영화인데 할머니들의 고군분투하는 모습, 사장님의 열심히 사는 모습이 좋아서 했던 건데 하다 보니 몰랐던 역사도 알게 되고 '너무 무지했구나' 하는 반성도 되고. 그러다 보니 '저는 뭘 해야 하죠?'라는 질문에 이르더라. 결론은 '진심을 다 해서 해야겠다'라는 것이었다. 일반적인 드라마였으면 어느 정도 이상은 못 했을 텐데 그 시대에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걸 최선을 다 하고 용기를 내셨던 분들에게 오히려 더 용기를 받아, 영화를 통해 나아갈 수 있었던 것 같다.

Q. 김해숙 배우는 촬영을 끝내고 우울증이 오셨다고 하시던데 그런 건 없으셨나?
A. 우울증보다 나는 언어적 스트레스 때문에 잘 쓰던 한국말도 잊어 버리게 되더라. (웃음) 그리고 이 촬영이 빨리 끝나기만 학수고대 했었던 건지 촬영 끝나는 날 막 울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오랫동안 일을 했어서 작품 끝나고 캐릭터에서 빠져 나오느라 산책을 한다거나 산에 오르는 정도는 해봤지만 끝나고 운 건 처음이었다. 기쁨의 눈물인지 슬픔의 눈물인지 모르게 촬영 끝나고 화장 지우려고 분장실에 들어갔는데 막 눈물이 나와서 이게 뭔가 싶었다.

Q. '허스토리'가 김희애 배우에게 그냥 영화 이상의 의미였나 보다.
A. 연기자로서 터닝 포인트가 된 것 같다. 감독님이 많은걸 요구하실 때는 힘들고 도망가고 싶기는 했는데 한계를 실험해 보는 느낌이 들 정도로 자신에 대한 도전이었다. 또 힘든 만큼 배우로 점을 찍은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보람도 있었다. 후회 없이 해서 기분이 좋았다. 감독님이 몰아붙이지 않았으면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끝까지 갔었다. 감독님이 너무 푸쉬했다. 대부분 대본 리딩을 할 때는 앉아서 하는데 나한테 리딩을 서서 리허설처럼 하길 바라셨다. 처음에는 좀 그랬다. '내가 신인도 아닌데 서서 연기를 해보라고?' 싶었는데 금방 반성이 되더라. 좋은 연기를 위해서는 어떤 것도 해볼 수 있는 건데 내가 너무 내 방식만 고집하는가 싶고 이런 게 바로 매너리즘이구나 싶더라. 감독님 입장에서는 일어로 재판하는 장면에서는 동선도 체크하기 위해 그러셨던 건데 나에게는 낯선 방법이어서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좋은 작품을 만났고, 할머니들을 위해 하나가 된 마음으로 최선을 다 하자는 이심전심이 모두에게 있었다. 그냥 작품처럼 대충 타협하지 말고 끝까지 해보자는 마음으로 연기 했던 게 큰 터닝포인트였다.


Q. 연기력이 굉장한 배우들이 많이 출연했었다. 그러면서 또 위안부 피해 이슈고 해서 배우들끼리 연대감 같은 것들이 있었을 것 같기도 하다.
A. 소재도 그렇고 중요한 씬을 찍을 때 조심스럽기도 했고, 연기 하시는 분들은 긴장도 많이 하셨었다. 눈빛만 봐도 '아 지금은 말 걸면 안되겠구나. 힘드시겠구나' 라고 공감이 되더라. 후배들이 연기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촬영장에 서로의 마음을 알아주는 동지애가 있었다. 또 다들 정신 바짝 차리고 하자는 것도 있었다. 실존해 계신 분들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그분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으려고 최대한 진심으로 하려고 정신 바짝 차리고 했었다.


Q. 역사적 사실에 대한 배우들의 열연에서 진정성이 느껴지더라. 그런데 반면 김선영 배우와의 괄괄한 연기 호흡도 인상적이었다.

A. 제가 원래 김선영 팬이었다. 같이 촬영한다고 해서 너무 좋아했고, 역시 좋더라. 좋은 배우였다. 모든 연기가 다 진짜다. 그래서 워맨스가 자연스럽게 나왔던 것 같다. 애드립으로 입 맞추는 장면도 연습을 많이 했던 것처럼 척척 이뤄졌다. 김선영에게 돈을 빌리는 장면인데 뭔가 마무리가 있어야 할 것 같아서 고민을 했었다. 눈빛 발사도 아닌 것 같고, 뽀뽀라도 해볼까 했더니 감독님이 해보자고 하더라. 막상 그 장면 촬영하고는 편집될 줄 알았는데, 완성본을 보니까 그 장면을 썼더라.

Q. 매번 새로운 캐릭터에 도전하시지만, 이번에 부산의 여성 경제인 캐릭터로 목청도 크고 드센 이미지로 변신한 건 인상적이더라. 어떻게 준비를 하신 건가?
A. 화면에 나오는 저를 보는 건 참 괴롭다. 제 목소리도 못 듣겠고.. 그런데 이번에는 처음으로 제 연기를 녹음 해봤다. 사투리와 일본어 때문에 녹음된 걸 들어 봤더니 목소리가 너무 약하더라. 더 터프하고 강해야 할 것 같더라. 사투리 선생님을 통해 배웠던 다양한 버전 중에 강한 버전을 선택했다.

Q. 드라마 '밀회'에서 '특급 칭찬이야'도 그렇고 영화 '사라진 밤'의 '당황할 때 귀여워'도 그렇고 이번 영화에서도 '여자들은 이기 문제인기라'대사도 굉장히 강렬한 한방이 있더라. 매 작품마다 인상적인 명대사가 나오는 비결은 무엇인가?
A. 대사가 맛있으면 살아 난다. 대본 자체에 '특급 칭찬이야'가 있었는데 신선했다. 내가 표현을 잘 했어서 대사가 산 게 아닐까? (웃음) 그런 대사를 만나는 건 운이 좋았다. 대본에 신선한 대사들이 있었고, 캐릭터에 어울리는 대사다 보니 자연스럽게 연기가 나왔던 것 같다.

Q. 결혼 전부터 특급 배우이셨는데, 대중들에게는 결혼 이후에 한 작품들이 더 많이 언급되고, 반응은 더 좋아진 것 같다. 연기에 결혼이 어떤 영향을 끼쳤나?
A. 결혼하고 아이 낳으면서 많이 달라지는 것 같다. 인생을 알아야 연기가 나오는 것 아닌가. 정상적인 사고와 정상적인 인생을 산 사람이 가장 정상적이고 노멀한 연기가 나온다고 본다.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살다가 나와서 생활 연기를 연기한다? 쉽지 않다고 본다. 물론 배우들은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한걸 연기하기도 하지만 직접 경험한 것은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재산이라고 본다. 결혼 전의 나는 풋내 나는 인간이었다고 본다. 나는 아직도 연기적으로나 인간적으로 더 노력해서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Q. 결혼 후 작품 보는 눈이 달라진 건 아닌가?
A. 나는 그냥 재미있으면 한다. 내가 할만한 가치가 있다 싶으면 한다. 지루하더라도 끝나고 나서 이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거구나 싶으면 할만한 대상이 된다. 끝났는데 무슨 말 하려는 거야 싶은 거면 망설여진다. 한 문장이라도 건질 만 하다 싶으면 할만한 작품에 포함 시킨다. 안 그러면 10년에 한 작품 하기도 힘들다. 사실 결혼하고 이 나이의 여배우에게는 작품 선택의 폭이 넓지 않다. 더 젊고 예쁜 배우가 더 많은 사랑을 받고 더 많은 작품을 하는 건 보기에도 좋고 자연스러운 것 아니겠나. 순리에 따르되 그때 그때 여건에 따라 작품이 들어오면 감사하게 생각하고 크게 따지는 편은 아니다. 일의 소중함을 예전에는 몰랐다. 결혼 전 연예계 생활을 할 때는 환경이 지금보다 열악했고, 지금보다 더 고생스럽게 작업을 했었다. 그래서인지 그때는 지금보다 더 인기가 많았지만 놀고만 싶고 피하고만 싶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일이 소중해지면서 더 겸손해지고 철이 드는 것 같다. 이번에 선배님들과 같이 작업 하면서도 느낀 게 많다. 일을 대하는 태도가 신인처럼 떨려 하시고, 일 하는 걸 감사하게 여기시며 힘든 내색을 전혀 안 하시더라. 다시 한번 일의 소중함과 감사함을 느꼈다. 일을 계속 해야 마음도 정신도 건강해 지는 것 같다.


Q. 김희애라는 배우는 워낙 고운 이미지, 좋은 이미지가 있어서 인지 한 번도 슬럼프를 겪지 않고 탄탄대로만 지나온 것 같다. 잠시 결혼 하시고 활동을 안 하신 때 빼고는 모든 작품이 다 잘되지 않았나?

A. 배우 활동하며 슬럼프 시절이 나도 있었다. 다들 기억을 못하시더라. 지나고 보면 그게 아무것도 아닌데 그때 왜 그랬나 싶고 누구나 지나오는 통과의례 같다. 슬럼프 없는 게 비정상 아니겠냐. 지금도 그렇다. 매일 좋기만 한 건 아니다. 박세리가 물에 빠진 공을 쳐내서 더 우승이 값졌던 것처럼 자기 분야에서 슬럼프를 겪은 이후가 더 값지고 빛나는 것 같다. 슬럼프는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머스트 해브 아이템이라고 생각한다.

Q. 영화를 위해 체중도 불리셨다고 들었다. 몇 키로나 불리신 건가?
A. 5kg 정도 불렸다. 난 사실 출산 이후부터 지금까지 한번도 체중에 변화가 있었던 적이 없었다. 쭉 화장품 모델을 하다 보니 조금만 먹어도 얼굴에 표가 나서 계속 유지, 관리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광고 계약이 종료되면서 자연스럽게 이런 역할도 하게 되며 연기를 위해 라는 핑계로 실컷 먹으며 살을 불렸다. 감독님이 처음에는 10kg정도 불렸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니 절반 정도 하니까 그만 해도 될 것 같다고 하시더라. 영화 찍을 때 불렸던 몸을 지금은 다시 빼고 있는 중이다. 감사하게도 다시 화장품 광고를 하게 되어서 예전 체중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다.

Q. 예전에 영화 '사라진 밤'때 만난 김강우 배우가 김희애가 철저하게 자기 관리하는 걸 보고 정말 놀랬다며 대단하다고 했었다. 자기 관리를 어떻게 하시나?
A. 그건 김강우씨가 철저하게 자기 관리를 해서 힘든 걸 알기 때문에 나보고 대단하다고 하는 거다. 김강우씨는 남잔데도 식단 조절 열심히 하고 운동도 열심히 하더라. 하루 이틀, 한달 정도 하는 거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건데 이걸 10년 동안 계속 하는 건 사실 너무 힘들다. 하지만 하다 보니까 적응이 되어서 인지, 여러모로 좋더라. 예뻐지려고 건강 관리를 하다 보니 건강해져서 더 예뻐지기도 하고, 건강해 지니까 근력도 생겨서 웬만한 활동에 쉽게 지치지 않는다. 음식은 양념이 많이 된 건 잘 안 먹는다. 고기도 기름에 튀기지 않고 물에 익혀 먹는데 수육 같은걸 부추, 양파와 함께 살짝 간장 소스 찍어 먹는 식이다. 그리고 매일 아침 5시 50분에 일어나 2시간씩 실내 사이클을 한다.

Q. 대단하다.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그렇게 노력한다는 게 보통 일은 아닌데... 세월이 지날수록 김희애라는 배우는 더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며 관객들에게 놀라움을 안겨주는 것 같다.
A. 좋은 세상을 만난 것 같다. 예전에 비하면 세상이 많이 바뀌었고, 배우에 대한 인식도 좋아졌다. 나는 점점 더 전성기 같고 점점 더 연기의 폭이 넓어지고 화려해지는 것 같다. 사람들은 내가 결혼 전에 전성기였다고 하지만 나는 그 당시에 우울하고 어두웠다. 지금이 그때보다 나이는 더 많지만 마음은 더 밝고, 현장이 기대되고 좋다.

1992년부터 1998년까지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위안부 피해자 관련 재판 사상 처음으로 보상 판결을 받아내 일본을 발칵 뒤집은 관부 재판의 실화 '허스토리'는 김희애, 김해숙, 예수정, 문숙, 이용녀, 김선영, 김준한, 이유영 등 연기내공 도합 200년의 쟁쟁한 배우들이 출연해 진심어린 열연으로 묵직한 울림을 주는 영화로 6월 27일 개봉한다.


iMBC 김경희 | 사진제공 YG 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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